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하)

[조선왕조실록 감성으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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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우(adriane)등록 2008.11.21 09:03

여자

 

태종만큼 외척을 철저히 무너뜨렸던 왕도 쉽사리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정비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아들 세종의 왕비 심씨의 가문까지 무너뜨렸다.

그런 그에게, 왕비란..여자란 무엇이었을까?

 

"임금의 대를 잇는 자식은 많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매, 내가 지난 해에 예관의 청으로 인하여, 3, 4명의 빈과 잉첩을 들였으니, 그들의 아버지인 권홍.김구덕.노귀산.김점등의 왕실에 향하는 마음이 반드시 다른 신하와는 달랐다. 한편으론 대를 이을 자식을 많이 두고,

한편으론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게 되며, 또 옛날의 한 번 혼인에 아홉 여자를 취한다는 뜻에도 맞는다. 지금 주상이 중전에게서 세 아들이 있지마는, 그러나 더 많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세종 즉위년, 태종이 세종의 후궁을 들여야겠다며 한 얘기다.

그는 후궁의 아버지들인 권홍, 김구덕등을 거론하며 이들이 왕실과 사돈을 맺으면서 왕실을 향하는 마음이 각별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들을 많이 두면서 아울러 여러 사람의 도움을 없게 되는 일을 여자가 많은 것에서 얻어지는 좋은 점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태종은 후궁을 얻으면서 여러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은 점이라고 했지만, 다른 이도 아닌 정비의 노비 출신이었던 효빈과 신빈, 그리고 내자시와 내섬시의 여종, 거기에 서울 기생 둘까지 도움을 바랄 수 없는 후궁도 여럿을 보았으니 틀리고,

정비가 태종에게 4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안겨주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동생들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단단히 일조했으니, 맞기도 하다.

 

태종은 정비의 동생들을 죽이면서 그들의 죄를 정비의 죄와 동일시 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네가 불순했기 때문에 후궁을 보는 것이고, 네가 투기 했기 때문에 동생들이 죽은 것이다. 라고. 그래서 나의 여성편력과 내가 너의 동생들을 죽이는데에는 너의 책임이 아주 크다고.

 

원경왕후는 지금까지 투기가 유난히 심했던 여걸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정비가 투기가 심하다고 하는 것들은 사실 대게는 태종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 온 얘기들 뿐이고, 태종은 그 얘기들을 후궁을 새로 들이거나 정비의 동생들을 죽일때의 수단으로 썼다.

오로지 정비가 질투심으로 인해 벌렸던 사건 자체로만 언급된 것이라고는 태종 1년, 정비가 태종이 가까이 하던 궁인을 불러 힐문했던 사건과,

태종 13년, 태종이 궁인 무작지에게 그녀의 어미에게 주라며 정포 10필을 얻어 주었던 것을 빼앗을 때 뿐이었는데,

첫번째 사건은 태종이 정비의 시녀와 환관을 내치는 것으로 대응했고, 두번째 사건 때에는 무작지에게 면포 100필과 정포 100필을 내려주었다.

 

정비는 바보같은 여자다. 그녀는 한번도 제대로 태종에게 대항해 본적도, 승리해 본적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투기가 심하다고, 대단한 여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앞서 태종이 세종의 후궁을 들이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신하들은 아울러 세종의 중전 심씨를 그녀의 아버지 심온의 죄를 함께 물어 내치자고 청했었다. 그러나 태종은 서경에 이르기를, 형벌은 아들에게도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물며 딸에게 미치겠느나며 이전에 민씨 일가의 일이 있어서도 왕비를 폐하자고 의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고 말한다.

 

이상한 일이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의 죄는 누명에 가깝다고 할만한 부분이 뚜렷이 보였고, 심씨 자체가 투기가 심하다느니 하는 그런 말을 들었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신하들은 당연하다는듯 왕비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씨의 처지가 정비보다 뭐가 그렇게 더 심한지 모르겠는데도 신하들의 태도에는 망설임이 없다. 역모의 죄로 동생들을 잃은 정비에게는 한마디도 한적이 없었으면서.

 

조선의 역사에서 투기가 심하거나 가족이 역모에 연관된 왕비는 거의 늘 폐출 논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원경왕후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머금고 남편에게 갑옷을 입혔지만 그것은 그녀가 강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의 꿈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그렇게.

 

태종의 여성편력은 당시대를 사는 사람들 까지도 심하다고 할 정도로 눈에 띄는 것이었고 정비는 태종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는 것밖에는 별로 할 수 있는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투기가 심하다고 낙인을 찍은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고, 왕을 무서워 하는 신하들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왕의 말을 주워섬기며 앵무새마냥 반복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정비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다. 왕에게 당신은 호색이다. 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던 자들이었는데도 그녀를 죄주라던지, 내쫓으라던지 하는 말은 꺼내지 않은것이었을 거다.

왕의 호색과 지독한 행동-자신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고, 동생들을 죽이고, 가문을 도륙내고, 그나마 조강지처이기에 내쫓지 않는거이라며 으름장을 놓는- 에 비해 정비의 그것은,

투기나 불순한 것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그런 가련한 것이었기에.

 

당신은

 

1420년 세종 2년 5월 27일에 정비의 병이 시작되었다. 학질(말라리아) 이었다.

세종은 정비의 병이 시작된 후 11번이나 어머니를 모시고 거처를 옮겨가며 병을 떼어내려 애썼다.

 

무당을 불러 제사를 지내게 하기도 하고 승려들을 불러 기도를 하게 하기도 하고, 학질을 다스린다는 술법도 시도해 본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도 소용없이 원경왕후는 7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56세였다.

 

역사속의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사건들과, 수없이 많은 비극들에 대해 책임을 전가한다. 여자가 투기하기 때문에, 너무 나섰기 때문에, 너무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혹은 너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궁금하다. 남자들은 그게 부끄럽지 않을까?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 모든 것이 여자의 손에 좌지우지 되었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 말이다. 결국 여자건 남자건 자신의 일을, 자신의 손으로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것임에 분명할텐데.

태종은 자신의 왕비가 투기가 심하고 불순하다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말했다.

그러나 만약 그의 왕비가 태종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다면, 혹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당신은 강하지만, 괜찮은 왕일지도 모르지만, 아내에게 있어서는 그저 한없이 치졸하고 이기적인,  남편일 뿐이라고.

 

 

 

 

2008.11.21 09:05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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