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울, 나의 도쿄

도쿄! (Tokyo,2008)

검토 완료

홍종혁(atum103)등록 2008.12.10 09:10

도쿄!(2008) 봉준호, 레오 까락스, 미셸 공드리 세 감독이 뭉쳐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 ⓒ 스폰지이엔티


세 감독에게 어느 정도의 틀과 자율이 주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약속이나 한 듯 단절된 '공간' 을 그려냈다. 어쩜 누가 봐도 '도쿄'라는 공간은 그렇게 미분되어 각기 따로 존재하는 섬과 같은 곳인 듯, 타인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전하는 것도, 그들의 주거 공간에 한 발자국 발을 내딛는 것도 쉽지가 않다.

히로코가 남자친구를 따라 상경한 뒤 처음 갖게 된 공간, 친구의 아파트, 그리고 자신들만의 아늑했던 공간인 차, 심지어 그 차가 놓이는 공간마저 빼앗기고, 결국 짓이겨지고 마는 폐차의 순간, 공간까지. 철없는 아키라를 바라보며 뻥뚫려버린 그녀의 가슴속을 관통하는 차가운 도쿄 뒷골목의 바람까지. 그녀가 자신의 체온을 오롯이 전해줄 수 있는 의자의 새 주인을 따라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록 단절된 공간일지라도 언제나 꼭 껴안고 있을 수 있는 '당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건물과 건물 사이를 바라보는 주인공들의 시선은 인상적이다. 가까운듯, 또 멀리 한 사람만이 간신이 지나갈 수 있을만큼 떨어진 건물의 모습이 외로움과 소외속에 살아가는 현대 일본인(혹은 도시인, 현대인)들의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서로 기대면 편하지만, 기댈 수 없는.

따스함으로 첫번째 작품을 덮으려는 순간 초록광인이 활보하며 나타나는 또다른 도쿄의 모습이 펼쳐진다. 히로코와 히키코모리둘이 내 공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공간 속에서 수동적인 것에 비해, 광인은 타인의 공간에 들어설 떄 보다 공격적이다. 하지만 역시나 '지하(하수도)' 라는 자신만의 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일본', '도쿄'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을 유쾌하게 조롱하는 지하도 안 수류탄과,  광인을 따라하는 시민들, 무표정으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 맹목적으로 광인의 처형을 찬성 혹은 반대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스케치는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면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광인의 입으로 "일본인이 싫다" 라고 말할 정도니. 그래서인지, 마지막 광인의 처형 장면에선 , 일본이 조선 독립군을 처형하던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광인이 먹고 사는게 오로지 '꽃과 돈'이라는 것 역시 레오카락스가 일본인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칼날이 아닐까. 예전엔 '국화와 칼'로써 일본인의 이중성을 꼬집었다면, 이제는 꽃처럼 간드러지는 그들의 미소 뒤에 숨은 자본의 파괴성이 일본을 설명하는 극한의 비유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 물론 여기엔 일본, 미국, 전세계가 따로 있겠냐만 -  따라서 감독이 괴물을 데리고 정말 뉴욕엘 가면 어떨지, 기대를 해본다. 

메시지가 좋은(즉, 내 마음에 드는) 영화는 그 구조의 허술함 따위는 관대하게 넘어가서 그런지 몰라도,  <흔들리는 도쿄> 가 가장 훌륭하다는 일부 평론가들의 분석에,  <아키라와 히로코> 가 여전히 산만하다는 분석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봉준호가 못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지지와 공감을 보내기 때문. 동시에 영화를 기술적으로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 미셀공드리 영화에서 '산만함'을 논하며 '언제까지 그럴텐가'를 묻는 건, 그 스타일에 애정을 갖는 팬들에 대한 무심함이 아닐지, 못한다기 보단, 안하는거라고 믿는 중인데.

여튼, 단절된 '도쿄인' 들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흔들리는 도쿄>다. 히키코모리라는 소재의 선택부터가 그렇다. 봉준호가 이전 <플란다스의 개> 를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작용을 훌륭히 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감독이 세상의 괴물들(살인범, 괴물) 을 다루는데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괴물을 '에이, 그냥 특정 누구의 얘기잖아' 라고 실소하는 순간, 텅빈 골목길을 보면서 느끼는 '한 방 맞았구나' 라는 깨우침은, 감독의 내공에 대한 감사함과 뿌듯함이기도 하고.  그동안 꽤나 힘들고 역동적이었던 전작들에서 벗어나, 소품같은, 햇살로 얘기하는 이번 작품속에서 감독은 꽤나 편안하지 않았을까, 즐겁지 않았을까 괜한 역할전이까지 이뤄본다. 

그 햇살을 깨고, 소품의 각을 깨는 '지진' 이라는 작용이 가져다준 울림은,  역사상 가장 귀여운 '재난영화' 하나를- 아무도 다치지 않는, 도리어 숨어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꺼내놓는 순작용의 재난을 - 선보이고 있다.

내가사는 곳, 서울

일상의 부딪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지나가는 지하철의 괴물들 속에 나의 껍데기도 하루하루 단단해짐을 느낀다.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서 좀 더 강하게, 그리고 부딪침 이후에 돌아보며 미안함을 드러내는 것도 금물, 유유히 사라져야 한다. 또다른 부딪침을 준비하기 위해서.

나의 도쿄

딱 세시간, 나리타에서 경유 하기위해 기다리던 공항 라운지. 그 누구와도 인사를 하지 않고, 카페테이아에 딸린 큰 테이블에 홀로 앉아 이국에서의 마지막 커피를 마셨다. 디저트까지 먹기엔 좀 비싸길래, 편의점에 들러 과자와 맥주를 좀 샀다. 섬처럼 도심에서 떨어져 있던 공항 한구석에 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 방송만이 기억나던, 나의 도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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