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하얀거탑"을 이야기하다.

패배(敗北)가 수반하는 연민의 메커니즘

검토 완료

최상훈(klake111)등록 2009.01.02 14:29
2007년 12월의 끝자락. 연말의 들뜬 분위기는 여느 해와 같았지만, 인터넷 공간만은 때 아닌 뜨거운 논란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2007 MBC 연기대상’에서 <태왕사신기>의 배용준이 <하얀거탑>의 김명민을 제치고 대상을 차지한 것에 대해 많은 네티즌들이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성토의 차원을 넘어 ‘이 정도로 얄팍한 수준의 연기대상이라면 폐지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시청자 행동’으로까지 발전할 기미를 보였다. 이 사건은 MBC드라마 <하얀거탑>에 대한 시청자들의 지지와 애정이 표면적인 수치인 시청률의 결과와 관계없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이었나를 다시 한 번 되새기도록 했고, 특히, ‘장준혁’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시청자들의 각별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냈던 이 독특한 캐릭터 ‘장준혁’과 그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 얼핏 보기에 ‘장준혁’이란 인물은 우리가 쉽게 사랑할 수 있는 캐릭터라 보기는 힘들다. 그는 대단히 유능하고 출중한 외과의사이지만, 늘 출세욕에 경도되어 있고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는 비열한 인간이다. 그에게 있어 환자란 살려야 할 인격적 대상이라기보다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일 장(場)이자 자신을 성공으로 이끌어 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헌신적인 아내가 있지만 그저 그녀의 정치적 배경만을 취할 뿐 다른 여자와의 이중생활을 버젓이 유지하고 있는 파렴치한이고, 자기 탐욕의 결과로 생긴 의료사고로 법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마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갖가지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우리는 ‘장준혁’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인가? 왜 회를 거듭해 갈수록 점점 그를 더 이해하게 되고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누구보다 처절하고 절대적인 패배의 고배를 마시게 되는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승리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코 승리자는 다수가 될 수 없고 그에 따라 다수의 실패자가 양산되는 것이 경쟁사회의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러한 다수의 패배자들에게는 승리자에 대한 찬탄은 있을지언정 시기와 질투의 집단 심리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반대로 다수의 패배자들 사이에선 패배의 경험과 우려에 기반한 공감과 연민의 집단 심리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패배자의 패배의 순간을 볼 때면 강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민의 메커니즘은 심지어 권선징악적으로 귀결되는 고전적 선악대립의 이야기 속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갖가지 악행으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을 자아내던 인물이었건만 결국 그가 처절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실체는 사실상 ‘연민’에 가깝다. 그간의 긴장과 압박상태가 해소되고 안도감이 몰려올지라도 그 처단의 대상에 대한 감정은 ‘통쾌하다’거나 ‘시원하다’는 것이기 보다 ‘그러길래 왜’라는 식의 미묘한 연민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패배자 보너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다면 ‘장준혁’에 대한 관객들의 지지와 공감은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우선 ‘장준혁’은 본격적인 내러티브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이미 본질적으로 ‘패배적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준혁’과 대학동기동창인 친구이지만 의사로서든 인간적 측면에서든 그와 대립항을 이루고 있는 ‘최도영’이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극중 ‘최도영’은 마치 출세지상주의에 함몰된 ‘장준혁’에게 저항하고 위협받다가 결국 병원을 떠나게 되는 위기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본질적으로 ‘승리자’의 속성을 갖는다. 부모님을 포함한 많은 가족들이 줄줄이 의사인 유복한 일가에서 큰 어려움 없이 의사의 길을 걷게 된 ‘최도영’은 당연히 승리에 대한 집착이 없다. 그는 그의 존재 자체가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명인대학병원을 떠나 작은 규모의 연구실에서 일하게 결과조차도 온전한 의미의 패배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한 결과가 그의 인생의 목표를 좌절시키거나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준혁’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시골의 가난한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명문의대에 진학하고 지금의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그는 기득권과 편견이라는 수많은 장애물들과 치열하게 싸워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가 도달해야 할 목표는 저 멀리에 있다. 이러한 본질적인 패배의 속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치열한 노력은 설사 그 방법이 그릇된 것일지라도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연민의 메카니즘이 빚어내는 아이러니다. 숱하게 나쁜 짓을 일삼는 ‘장준혁’의 드라마 속 테마곡이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이라는 가사를 갖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가 된다. 

‘장준혁’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의 전문분야였던 췌장암으로 인해 막을 내린다. 마치 추락하기 위해 정상에 오른 것처럼 갑작스럽고도 허망한 죽음이다. ‘죽음’은 완벽한 형태의 패배이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을 뿐더러 이전의 모든 행위를 돌이킬 수 있는 기회마저 모두 박탈한다. 이 경우 관객들은 미묘한 심리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간의 인물의 행위에 대한 선악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경험이다. 존재를 말살당한 패배자에 대한 비난의 가치나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더구나 ‘장준혁’이 맞이한 ‘죽음’이라는 패배는 참으로 처절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선언된다. 그간 그에게 있어 치열한 투쟁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적들에 의해 수술 집도가 이루어지고, ‘사형선고’ 역시 그들에 의해 내려진다. 완벽하고도 처절한 패배이다. 우리는 이런 완벽한 패배에 대해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연민으로 반응 할 수밖에 없다.  

<하얀거탑>이 가진 탁월함은 권선징악과 패배에 관한 기존의 화법들을 교묘히 비틀고 조합해 신선한 방식의 충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장준혁’은 모든 선한 가치들을 부정하고 그릇된 행위를 일삼는 악의 화신이지만, 그러한 그의 모습조차도 공감과 연민을 받을 이유를 충분히 제시해 관객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악의 화신’처럼 보이던 존재가 얼마나 처절하게 패배해 가는가를 목도하는데서 강한 연민을 유도해내는 이 작품은 아이러니가 이룩한 탁월한 성취이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