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사업은 “평화 살리기”와 “경제 살리기” 사업이다(4)Ⅲ. 조갑제 기자, 진실을 향한 기자정신에서 수구기득권의 이데올로그로!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수구이데올로기를 위해 태도를 바꾼 인물 가운데 조갑제 기자를 제외한다면 적잖이 섭섭할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조갑제 기자는 진정한 프로정신을 보여주는 대단한 사람이다. 정치 뿐 아니라, 통일, 역사, 사회, 자원, 심지어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그가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이며, 깊이는 그 분야 전문가 못지않다. 그의 글은 동연배 기성세대 뿐 아니라 처음 사회를 배우기 시작하는 20대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냉정하게 평한다면 저널리스트로서 한 시대의 선지자였던 리영희씨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조갑제 기자 정도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러한 대단한 성실성과 직업정신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조갑제씨 역시 언제부터인가 변한 자신의 수구이데올로기를 위해 진실을 파묻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어쩌면 그 자신이 속고 있는 줄도 모른다. 특히 그의 민족, 통일, 역사와 시대에 대한 관점 변화는 극과 극을 달린다.요즘 역사를 둘러싸고 극단적으로 다른 견해들이 충돌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소위 보수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바로 살린다며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미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던 이승만 시대의 정통성을 되살리기 위해 당시를 미화하는 시도는 도에 지나칠 정도다. 이승만 시대를 미화하려니 반민특위 와해를 비롯한 소위 친일파 전통이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재기한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려하거나 축소시키려 한다. 그러한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조선일보와 그 핵심 조갑제 기자의 활약 역시 빛나는 대목이다.한마디로 “그 때는 누구나 어쩔 수 없었다. 이완용을 비롯한 이미 알려진 을사 5적 정도의 악질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파고드는 것은 민족화해와 국민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다. 특히 조갑제씨는 당시 친일파 회생을 이렇게 합리화한다.“신생 독립국가의 주류집단이라면 이승만 대통령과 초대 장관들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중 친일파는 없었다. 있었다면 이들 지도층 아래의 관료와 경찰이었다. 이들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수하였지 주류층은 아니었다. 건국과 반공이 친일파 단죄보다도 더 시급하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관료들의 경험을 살 수 밖에 없었다”(조갑제, 월간조선 2001년 9월호, 246쪽)친일청산 문제를 굳이 초대장관들 몇 명으로 한정하는 그의 자의성도 우습지만 실제적인 정권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관료들과 경찰들의 친일이력쯤은 아무 것도 아니거나 불가피했다고 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상식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실사구시, 정론과 기자정신을 강조하는 조갑제 기자 자신이 불과 20여 년 전에만 해도 이와 다르게 주장했다.“…매글린 대령이 보고했던 내용에 따르면 ‘일제하 한국인 경찰 8천명 가운데 5천명이 미군정 경무부에 의해 재임용되었으며 그들이 경찰의 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경력자를 우대했으므로 1946년 당시 경위급 이상의 간부 가운데 82%가 일제경찰 출신이었다.”(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조갑제, 한길사)그는 단지 친일 경찰출신들이 해방 후에도 살아남았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당시 정부와 한민당 등 정부와 정치권 주류에 들어가 생존을 위한 대변신과 함께 시대왜곡에 앞장섰다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해방이 되자 이들 일제 경찰·헌병 출신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직면하게 됐다. 북한에선 소련군과 공산당에 의해 많은 친일부역자들이 추방 구속 기소되고 투옥 사형되었다. 이를 피해 수많은 일제경찰 출신들이 살길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중략) 미군의 일제경찰 출신 중용 방침과, 친일성향이 강했던 한민당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서 친일경찰 출신들은 북한에서 쫓겨난 일제경찰출신들까지도 포용, 군정 3년간 최강의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독립투쟁 경력이 있는 양심세력과 양민들을 탄압, 경찰에 대한 반감을 국민들 속에 심었고, 이런 반감은 좌익이 주동한 폭동에서 분출되기도 했다. 정부수립 뒤 일제경찰 출신들은 계속해서 경찰권을 장악하여 온갖 음모와 술수로써, 친일파의 단죄를 노리는 반민특위를 와해시킨다. 일제경찰 출신의 일부와 일제헌병 출신들은 군의 수사기관도 휘어잡아 이승만 정권을 지키는 양대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됐다.”그는 경찰 등 친일관료들이 한국현대사 왜곡의 중심에 있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앞서 월간조선에서의 주장과는 다르게 그는 그런 친일파들이 독재 이승만 정권의 버팀목이었음을 주장한다. “이승만 독재정권하에서 일제경찰 출신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등계 형사 출신들은 정권의 3대 파수꾼인 경찰, 특무대, 헌병의 중추부를 장악, 폭력배들은 외곽집단으로 이용하면서 권력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들은 충견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길만이 유일한 생존의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끊임없이 정치사건을 조작해갔다.”그는 이승만 시대를 넘어 5.16과 유신시대를 거쳐 한국현대사 왜곡의 흐름들 속에서 친일관료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감당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4·19의거의 주요 원동력은 권력의 주구 경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였다. 그러나 4·19와 5·16은 8·15 때와 마찬가지로 일제경찰들은 단죄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의 유산을 이어받고 말았다. 일제, 미군, 한민당, 이승만 등 민족과 정치노선이 상반된 여러 권력집단을 섬기는 데 이력이 난 경찰은 5·16뒤에는 군부 통치집단을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게 됐다. 이런 변신의 과정을 통해서 일제경찰 출신들은 이 땅에 가치관의 전도, 고문, 용공조작, 그리고 교묘한 변명의 논리를 확산시킴으로써 사회정의를 황폐화시키고 관민 간에 위화감과 불신감을 조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놀랍게도 이러한 글들은 바로 조갑제 기자 자신의 홈페이지 ‘조갑제 닷컴’에 버젓이 올라있는 자신의 화려한 이력 중 하나이다(고문과 조작의 뿌리 1, 조갑제 닷컴)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러한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근거로 참고한 자료다. 그것은 이젠 조갑제 기자 자신이 좌파빨갱이들의 의식화서적으로 여기고 있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이었음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45년 당시 식민지관료기구에 근무했던 한국인 관료들에게 친일과오는 생사를 좌우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한의 개혁을 방해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런 관리들의 수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일제말기 고위관리들(칙임관 이상) 가운데 한국인의 비율은 18내지 24퍼센트에 이르렀고 1942년의 경우에 442명이었다. 경찰의 경우 13내지 19퍼센트에 달해 일제 말에는 210 내지 250명 수준이었다. 한국인 판사와 검사의 비율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초대 서울시장 이범승은 일제하에서 9년 동안 황해도지사를 지낸 사람이었다.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 이상기는 일제하의 대구복심법원 판사였다. 경북도지사 김대우, 전남도청 내무부장 임문무 등 두 사람은 일제시대의 고위관리였다(필자 주 : 김대우는 황국신민서사를 지었다).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pp.263∼66 재인용) (고문과 조작의 뿌리2, 조갑제 닷컴)그래서인가? 그는 위 글의 인용출처를 밝히면서 번역자 이름까지 적으면서도 끝내 위험한 이름 브루스 커밍스의 저작이라는 것은 밝히지 않고 있다. 말을 자주 바꾸는 거짓말 정치인들을 항상 가장 비판해 왔던 1급 언론인 조갑제씨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순간이다. (계속) #허위 이데올로기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