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식 모놀로그 <박정자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공연포스터 ⓒ 월간 객석
인생엔 창문이 있어야 해요. 답답할테니까... ...
나이 든 여자의 얼굴은 어딘가 육친의 얼굴과 닮아있다.
동네 시장통 생선 좌판의 할머니는 새벽같이 깨워 아침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의 얼굴과 닮아 있고, 가끔 나가는 무료급식소 반장 김 할머니는 늘 곱게 단장하길 좋아하시던 할머님과 닮았다.
브람스라곤 학창시절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대학축전서곡>밖에 모르던 나지만 이 공연을 선택한 건 고모님과 닮은 배우 박정자 선생 때문이다.
'인생엔 창문이 있어야 해요. 답답할테니까... ...'(극 중 나레이션 中에서.)
할머님, 어머님, 고모님...
그녀들에겐 모두 인생의 창문 같은 것이 없었다. 만약 창문이 있었다면 창문밖에 서 있는 얼굴은 '나'였을 것이다.
겨우 창문밖에 나 같은 얼굴을 세워둘수 밖에 없었던 육친의 얼굴과, 무대라는 황홀한 창문을 가졌던 박정자 선생의 얼굴을 습자지에 대 놓고 비교하고 싶었다.
한 시절을 풍미하는 배우에겐 뭔가 남다른 게 있기 마련이다. 나는 한없이 기대하고, 고대하며 무대 위의 그녀를 기다렸다. 단지 박.정.자.라는 이름 석 자에 기대어서.
박/정/자 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사강의 일생에 대해 말하는 박정자. 사강, 브람스, 박정자. 세 예술가들의 사랑과 좌절이 담긴 인생의 궤적이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 사이로 유유히 흘러간다. ⓒ 월간 객석
기대와 달리 극은 하우스콘서트 형식이다.
나는 무대와 관객을 좌지우지하며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신음하고 오열하는 박정자 선생의 모습을 은연중에 기대했던 것이다.
늘 참고, 속으로 삭이는 것만이 생을 견디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육친의 얼굴과 다른 발산하고, 폭발하는 박정자 선생의 얼굴을 기대했던 것이다.
허나 그녀는 오선지의 한 옥타브를 벗어나지 않는 목소리로(아... 선생의 깔끔한 딕션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조용조용 속삭인다.
영화 <이수>를... 사강이... 브람스가...
연주는 아름답고, 노래는 처연하다. 특히 <영원한 사랑- Von ewiger Liebe>을 부르는 소프라노 이선영에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연주와 노래는 아름답지만, 선생의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고대하던 나는 이 극의 타이틀이 왜 <박정자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인지 의아하다.
'이 정도라면 굳이 그녀가 아니라 연기 좀 하고 목소리 좋은 여배우 아무나 앉혀서 이끌어 갈 수 있는 무대인데.... 굳이 배우가 아니라 심야 라디오 방송 DJ 정도면 족하겠는데...'
허나 빨간 드레스의 여인이 등장해 '페드라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 의구심은 감탄으로 바뀐다. 나는 마지막 5분을 보기 위해 객석에 앉은 관객이 되었다.
젊은 날 무대를 호령하고 좌중을 압도하며 장엄한 서사시를 쓰던 여배우가 이제 서정시를 쓰고 있다.
시는... 슬프고 아름답고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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