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한 사람을 경찰에 고소하고, 경찰은 각하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수사를 벌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신한은행은 원주지점장 재직중 고객 예탁금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돼 감사가 진행되자 지난해 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모(당시 48세)씨를 횡령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검찰사건사무규칙(법무부령 제576호)에 따르면 이미 사망한 게 확실한 자를 대상으로 한 고소 고발사건은 '각하' 형태로 수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수사를 해봐야 처벌할 대상도, 공소권도 없기 때문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신한은행이 자칫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김씨를 고소한 까닭은 무엇일까. 경찰은 또 무슨 이유로 아까운 인력과 시간을 낭비하면서 수사를 벌이고 있을까.
사건 개요는 이렇다.
지난해 12월 30일 강원도 횡성군 야산에서 당시 신한은행 원주지점장이었던 김씨가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이 때만 해도 김씨의 죽음은 세간의 주목을 끌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나 김씨의 자살 이유가 베일을 벗으면서 금융가는 물론 원주지역에 메가톤급 후폭풍이 예고됐다.
숨진 김 지점장은 원주의 한 공공기관이 예치한 예산 400억원 중 225억원을 자신의 타 금융기관 계좌로 빼돌린 사실이 본점 감사팀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면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씨는 빼돌린 225억원 중 주식과 펀드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입은 170억원과 아파트 한채를 구입한 것 이외에 나머지 횡령금의 정확한 사용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한은행이 김씨의 사망으로 각하될 게 뻔한 사건을 뒤늦게 고소한 것도 결국 나머지 횡령금에 대한 정확한 사용처를 밝히려다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망인을 처벌할 수는 없지만 경찰의 계좌추적을 통해 차명계좌 등으로 빼돌린 돈이 발견되면 회수하고, 은행차원의 손실처리도 명확히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융기관 특별감사도 밝히지 못한 나머지 수십억 원은 어디로 갔을까. 경찰은 현재 김씨의 계좌추적에 나서는 등 수사에 착수했지만 공소권 없는 사건의 특성상 수사의 강도가 높을 리 없고 따라서 횡령 혐의에 대한 사실 확인수준에서 그칠 공산이 크다. 그러나 계좌추적 과정에서 김씨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람들이 드러나면 로비나 청탁, 뇌물수수 쪽으로 수사 방향이 옮겨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씨의 횡령에 대한 특별감사도 원주 출신인 김씨가 평소 돈을 물 쓰듯이 쓰는 것을 의심한 내부 직원의 제보가 단초가 됐고, 또 매년 금융기관 간에 공공기관 예산 유치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김씨가 횡령한 돈의 상당액을 로비자금으로 사용했을 개연성이 높기때문이다.
이 지역 한 방송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김씨와 가깝게 지내며 현금이나 고가의 선물을 받았던 인사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조만간 불려갈 텐데 그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좀 그렇다. 불편하다" "경찰 수사한다 그러면 잠못 자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라는 등 전전긍긍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제 발 저린 사람들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적당한 선에서 경찰수사가 마무리 되도록 은밀하게 로비를 벌일 수도 있다는 다소 앞서가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따라서 경찰이 공소권이 없어 각하해야할 사건이라고 대충 덮지 말고, 수사에 박차를 가해 항간에 나도는 불법 로비설의 실체를 밝혀 향후 유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려야 한다. 또, 금융기관 예탁금 관리 시스템의 구조적 허점을 보완하고, 직원들에 대한 내부 통제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시중은행에서 발생한 금융사고는 모두 230건으로 관련 금액만 4152억원에 달하며, 이 중 담보나 보증 등을 통해 회수할 수 있는 금액을 제외한 금융기관 손실 금액은 1485억원이었다. 사고유형별로는 횡령 및 유용이 3109억원으로 전체의 75%를 차지했고,배임이 691억원,사기 392억원,도난 및 피탈 286억원 순으로 나타났다.
2009.04.06 1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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