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권하는 사회

검토 완료

신아연(ayounshin)등록 2009.05.20 16:27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일부러라도 만들려고 저녁 설거지를 마치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이 옆에 슬쩍 앉습니다.

 

이곳 호주에서 몇 달간에 걸쳐 젊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댄스 콘테스트가 엊그제 막을 내리는가 싶더니 언제 시작했는지 이번에는 화면 가득 요리 경연대회가 펼쳐집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한요리한다'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이른바 '요리의 달인'으로 뽑히게 되면 앞서 등극한 춤의 황제처럼, 비록 길은 달라도 그 날로 팔자가 달라지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입니다. 요리를 테마로 하는 엔터테이너로 종횡무진 화면을 누비며 스타의 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분야가 분야인지라 앞서 치른 현란한 춤대회는 또래들의 혼을 홀딱 빼놓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마침 시집 쪽의 사돈 청년이 최종심에 오른 출연자들의 안무를 맡은 탓에 그 청년이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제 두 아이의 부러움섞인 탄성과 환호는 그 어느 때보다 요란했습니다. 그날 탄생한 호주 최고의 댄서는 '대박이 터졌다', '내 인생은 한방에 해결이 났다'는 뜻의 소감을 밝혀 또한번 비슷한 연령대의 가슴을 심란스레 울렁이게 했습니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듯이 이런 류의 쇼는 신인가수 등용문도 있고 개그 콘테스트도 있습니다. 모델을 뽑는 대회도 상황은 비슷하게 전개됩니다. 타고난 끼와 재능을 발산하고 남과 겨루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에 누가 뭐랄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문제는 그런 재능이 없어서 살맛이 안 나거나, 그런 재능도 없으면서 바람이 든 부류들의 현실감 상실에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는 착실한 사회인은 더이상 서방세계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의 선망이나 관심의 대상이 못됩니다. 모범생은 고사하고 진득하게 학교만 다녀주어도 부모로서는 고마워할 판입니다.

 

이렇다할 재주가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없는 재주라도 억지로 만들어볼 요량으로 우선 학교부터 뛰쳐나오고 보는 10대들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 헛바람 든 상태로 사회 언저리를 서성이며 방황하고 반항하는 것을 마치 예술가의 숙명이자 이해받지 못하는 천재의 고뇌 쯤으로 여기는 것도 그 부류들의 상징적 캐릭터입니다.

 

지들 사이에서는 과단성의 부족으로 통할지 몰라도 어쨌든 학교를 당장 '때려 치우지'는 못하는 아이들도 학업에 흥미를 잃은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루함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에 뒤채는 허황한 몸짓인 것입니다. '스타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무언의 구호는 청소년들 사이에 암묵적 동의를 얻으면서, 공중파 방송의 젊은이 대상 장기자랑 프로그램의 강한 전염성을 타고 '스타 권하는 사회'로 몰입케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젊은이들의 사고에 한 방에 대박을 내겠다는 허황된 아집이 뿌리를 내리면서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장래를 준비하는 정상적인 모습을 남루하다못해 패배자의 그것인 양 업신여기는 풍조가 생겨나게 된 것 같습니다.

 

재주가 없다보니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지 못하고 대학까지 오게 되었다는 푸념 아닌 푸념을 하는 '아직도 바람이 덜 빠진' 학생들을 주변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성실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은 도무지 삶이 아니라는 식의 왜곡된 생각 때문에 대다수 젊은이들은 현실감각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속이 허허롭고 붕붕 떠서 도무지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지가 않은가 봅니다.

 

한국의 젊은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도 결국은 같은 맥락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도박처럼 꾸리며 자기가 누구인지, 삶의 목표와 방향이 무엇인지,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두발을 어디에 딛고 있는지 균형감각을 잃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내린 결과가 아닌가 말입니다.

 

올해 대학을 들어간 제 둘째 아이는 자신의 미래가 현란한 쇼프로그램에서 결정될 행운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일찌감치 김이 빠진 듯 합니다. 그러면서 "글쓰는 대회 같은 건 없잖아, 그런 것도 있으면 좋은데.." 라며 푸념조의 말을 뱉습니다. 글을 잘 쓰는 편인 제 아이는 아마 자기도 뭔가 남과 겨루는 일로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가 봅니다.

 

"대학이 바로 그런 걸 하는 곳이잖아. 너는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니 앞으로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고"라며 아이의 마음에 들지도 않을 궁색한 격려를 하고서는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바로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타가 되기에는 이미 글러버린' 아이는 제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텔레비전을 보다말고 슬그머니 제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덧붙이는 글 | 자유칼럼그룹에도 실렸습니다. 

2009.05.20 16:21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자유칼럼그룹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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