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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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angello)등록 2009.05.24 15:31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으로 약칭)의 죽음은 한국 사회의 본질을 새삼스럽게 자각하는 일대 계기이다. 

 

나는 노무현의 쓸쓸하고 처참한 죽음은 우리 시대 진보를 희망한 모든 이들의 패배이고 절망이라고 주장한다. 소위 진보 세력도 이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노무현은 합리적인 보수였을 뿐, 결코 진보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기준에서는 분명 타당한 측면이 있다.

 

노무현은 (어떤 정치학자가 제안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절대 기준인 "신자유주의 경제 노선에 대한 입장"에서 그것을 지지했다. 그는 재임초기부터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려고 했고, 고용시장 내에서 비정규직을 대량으로 양산했다.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고, "국익"을 명분으로 아프간에 용병을 파견하는 현실을 정당화하기도 했으며, 더많은 의석수를 갖고도 국보법을 폐지시키지 못했고, 계속된 실책으로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켜 수많은 서민들을 울렸다. 한미 에프티에이를 성급하게 추진했고 그의 재임 시절 동안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수많은 진보 학자들과 단체들로부터 한나라당을 향한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는 비판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를 지지하기 위해 독립한 열린 우리당에서조차 제명되는 사태까지 내몰렸다. 이러한 지지층의 이탈은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갖다 주는 가장 어이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죽음이 과오에 대한 면죄부일 수는 없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을 한나라당, 조중동, 검찰과 사실상 동일하게 취급한 우리의 오만하고 비사실적인 판단과 대응이 지금 이 민주주의 역행의 결과를 가져온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여기서 나는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나는 민주/반민주의 구도가 효력을 상실한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진보/보수로 구분하는 해석 구도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교정하려고도 하지 않는 한국 사회과학학자들의 학문적 열정에 냉소를 보낸다.

 

철학자로서 나는 한국 사회는 결코 서구적 개념의 보수/진보의 구도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고 한다면 그 때 보수와 진보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내포하는가에 관한 정확한 정의가 뒤따라야 한다.

 

어떤 가치, 어떤 지향에 대한 보수이며 진보인가? 그것들은 공통의 아젠다를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보수나 진보라는 개념으로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고, 그것은 무슨 정치적인 효과를 지니는가?

 

보수/진보 구도는 학문적으로는 분명한 오류이며, 정치적으로는 보수라고 지칭되는 이들에 대한 사실상의 면죄부이다.

 

나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소위 보수로 지칭되는 집단이 전통 종교나 철학, 심지어 최소한의 도덕률에 기초한 어떠한 집단적 아이덴티티를 공유하고 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지켜야 할 전통적 가치에 대한 어떠한 일관된 이해나 행동도 보여주지 못했다. 차라리 그들은 지극히 반도덕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경제발전의 공헌은 그들의 비도덕성에 대한 타당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더불어 경제발전은 리더십에 의한 성공임과 동시에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과 참여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들은 보수도 아니고, 극우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마땅히 그들에게 붙여 마땅한 다른 개념을 찾아야 한다.

 

나는 보수라는 그들에게 과분한 개념 규정을 허락하는 학문적 나태함과 오류가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특성을 희석시켰고 청산해야 할 그들의 역사성에 권위를 부여한 중대한 문제를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하여 나는 여기서, 많은 제기 가능한 비판과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잠정적으로 "개혁"과 "반개혁"이라는 구도와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 때 내가 사용하는 "개혁"이라는 개념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형성 과정(일제 식민지 경험과 친일 인사 청산)과 건국 이후의 정치 과정(한국 전쟁, 이승만 독재, 4 19, 박정희 군부 독재, 전두환 노태우 쿠테타, 민자당 삼당합당 등)에서의 모순과 오류에 대한 비판, 저항,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소위 "개혁"이라는 시장 중심의 질서 재편은 내가 말하는 "개혁" 개념이 될 수 없다.)    

 

내가 사용하는 개혁 개념은 한국 정치 구조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의식을 겨냥한 것으로, 이 개념에서 개혁은 당연히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사회 모순에 대한 개혁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여 개혁 개념은 한국 역사와 정치의 오류와 모순를 말 그대로 변혁하고자 하는 집단을 일컬으며, 반개혁 개념은 그것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현상 유지적 태도를 취하는 정치 세력을 규정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본질적으로 정녕 "느슨한" 개념이어야 한다.

이 "느슨함"의 조항은 사회 세력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의 "개혁" 개념의 타당성을 약화시킬 결정적인 독소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다 다양한 역사성과 경험, 지향성을 가진 집단들을 개혁과 반개혁이라는 하나의 구도 안에 편입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한계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느슨하기에 개혁과 반개혁 구도는 교집합을 가진다.

나는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이 교집합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국민들은 경제발전에 대한 반개혁 세력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반개혁의 도덕성과 권위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정체성과 역사성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사민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의 가치를 표방하는 집단과 (영미 신자유주의에 대한) 개혁적 자본주의 및 생태주의 등 대안적 문화운동의 정치 그룹은 모두 개혁 세력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민주/반민주, 민족/반민족, 통일/반통일, 자본/노동, 자본/반자본, 자본주의/사회주의 등의 구도가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을 설명하는 적합한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이러한 규정을 고수하려는 집단에 의해 한국 사회의 개혁과 진보에 대한 새로운 토론과 담론 창출이 억압당해왔다고 믿는다. 

 

더이상 북한식의 혹은 유럽적 개념과 사회 이해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여 한국 사회를 재단하는 과거과 현재의 어리석음을 당장 중지해야 한다. 분석과 이해는 우리 자신의 경험에 굳게 뿌리박고 있을 때 가장 설득력있다.

 

이렇게 되면 현재 한국 사회의 모순에 대한 판단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항이나 거부냐 하는 기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형성 단계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모순과 오류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의 여부라는 기준에 달려 있게 된다. 따라서 앞으로의 개혁적 담론 역시 우선적으로 경제 체제에 대한 거부나 대안보다는 정치 현실에 대한 갱신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나는 결단코 경제 체제에 대한 반성과 재조정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우리 논의의 지형을 축소시키고 수많은 사람들과 집단들을 이탈/배제시킬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지금의 이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할 필요와 사명을 갖는다.  

 

우리 사회의 역사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기초하여 새로운 의제들, 경제, 문화, 생태 등 다양한 관심을 결집해야 하며, 우리 사회의 이 끈질긴 모순에 대한 공통의 공감대 위에서 개혁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설득해 내야 한다.  

 

나는 개혁/반개혁이 최종적인 대안 개념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사회과학자들이 이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것을 훌륭히 대체해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기존 개념을 폐기하고 지금 우리 대립의 지점을 설정하여 그 대안을 모색하자고 주장한다.

 

미국처럼 우리도 새로운 진보 담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먼저 제대로 규정하자. 이 글이 오직 그 목적이다.

 

노무현의 외로운 죽음은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답은 남은 우리의 몫이다.

 

2009.05.24 15:31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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