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우스 (ハウス, 1977) 하우스 (ハウス, 1977) 포스터 ⓒ Toho Company
여름방학을 맞아 여덟 명의 여고생 무리가 교외에 위치한 아름다운 집을 찾아간다. 그 무리들 중 한 명(주인공 오샤레)의 이모가 살고 있는 집이라는 단서가 붙어서일까? 그 집은 (어떻게 보면 과할 정도의) 따스한 온기로 여고생들을 맞이한다. 딱 봐도 여고생들 취향에 딱 부합하는 집 안에서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을 시간들이 잠시 동안 이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 '하우스'를 아는 관객이라면 이런 흐름이 언제고 지속될 거라 믿지 않을 거다. 당연하다. 이건 예쁘장한 외피를 감싸 안고 있지만 속은 분명 호러영화거든.
컬트 팬들의 단단한 지지를 등에 업어 온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하우스>가 무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한국의 스크린 앞에 당도했다. 멀지 않은 저 옛날 상영회라는 작은 공간에 꿇어앉아 수동 자막 입력 기계로 들어간 자막을 보며 이 영화에 정신을 반납했던 이들의 천진한 눈길은 어느덧 10년 가까운 시간을 건너 지금에까지 이어진다. 그 현장이 극장 상영관에 재현된 순간, 자지러지는 사람들과 혼란스러움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상영관 안에 휘감겼다.
무리는 아니다. 눈앞에서 마구잡이로 해체되고 결합되는 이미지들의 조합은 흡사 어렸을 적 관광지 홍보용 장난감 카메라를 돌려 보는 느낌을 선물하고, 청춘영화에 가까운 모양새를 보여 주는 중반까지는 호러영화를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의문마저 품게 만든다. 그러나 오샤레의 이모가 목숨처럼 껴안고 있는 하얀 고양이의 입에서 배어 나오는 신경질적인 울음소리가 귓가에 박히는 순간, 가장 평온했던 공간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두려움의 공간으로 돌변한다. 피아노는 피로 물들고, 푹신한 이불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식인 매개체가 되며, 정신없이 뒤틀리는 추상적인 집의 형상은 절로 몸을 들썩이게 만든다.
그렇다면 <하우스>를 통해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이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감독의 말을 인용하면 '전쟁을 모르는 세대(여기서는 소녀들)'에게 닥쳐오는 '친근함의 공포'를 '꿈을 그리는 방식'으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애초에 '리얼리즘은 관심 바깥'이었던 셈. 때문에 이야기의 질량을 중시하는 관객들에게는 한없는 괴작의 냄새가 풍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오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관객들이라면 30년이 지난 지금 당도한 이 독특한 호러영화를 음미하며 피식 미소 지을 수 있으리라.
다시 한 번 결론을 상기시키자면, <하우스>는 아름다운 외피를 감싸 안고 있으나 그 안에는 서늘한 그림자를 내포하고 있는 한 편의 괴상한 영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괴상함이 괴상함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가지 매혹적 요소를 곳곳에 남겨 놓는다는 점이다. "왜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 놓았을까?" 하는 생각 정도는 분명 품어 볼 가치가 충분하나, 때로는 긴 생각 없이 이미지에 시력을 온전히 빼앗기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흡사 어린 시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장난감 카메라를 안을 들여다보며, 혹은 정신없이 휘감기는 만화경 속 세상을 들여다보며 정신을 쏙 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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