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사과문을 비판한다

책임의 부재와 감정의 호소로 쓴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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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식(hosik79)등록 2009.09.12 10:35
2PM의 리더 박재범이 그룹을 탈퇴하고 미국으로 떠난 후 JYP 대표 박진영은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사과문 발표는 박재범 사건을 일개 연예인에 관한 문제를 떠나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쟁점 중 하나인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갈등'으로 해석하게 했다. 이에 필자는 중립적인 견해를 버려야 할 시점임을 깨닫고 JYP 대표 박진영을 비판하고자 한다.

필자는 앞서 '우리 안의 파시즘, 22 세 청년을 옹호하다." 라는 글을 통해 박재범 군의 한국 비하글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 견해가 없으며 또한 박재범을 비난하는 여론을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것이 오히려 '파시즘적 태도'라고 역설했다. 이때까지 필자는 박재범 파문을 일개 연예인에 대한 비난 여론 이상으로 이 사건을 확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박재범의 한국 비하 발언'이나 '그에 대한 비난 여론' 과는 상이한 양상을 띠고 있는 박진영의 사과문은 이 사건이 일개 연예인의 문제를 넘어 섰다고 판단하게 했다.

박진영의 사과문은 두 가지 부분에서 한국의 정치 및 경제 기득권층이 주로 구사하는 전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와 '소통의 전면적인 거부'이다.

첫째,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는 상대방의 연민이나 동정심에 호소하여 자신의 논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오류이다. 박진영 사과문에 따르면 박재범은 원래 불량한 아이였고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박진영 자신은 불량한 아이일수록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성을 믿고 키웠다.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 박재범 군은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제 행복해질 시점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일을 들추어낸 네티즌이 박재범 군의 행복을 박탈해 버렸다. 이 사과문에 대해 객관적으로 논평하자면 이것은 사과문이 아니라 청춘 드라마 시나리오에 가깝다. 이 사과문에는 박재범 논란에 대한 중요한 논점을 모두 비켜갔다. 재범 군의 한국 비하가 정당한 것인지, 네티즌의 과잉 대응이 부당한 것인지, 재범 군 소속사 대표로서 책임은 무엇인지, 여론 수렴을 통한 대안은 없는 것인지 등등 현안에 대한 중요한 논점은 단 하나도 다루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래 불량했던 재범 군'과 '그의 행복을 앗아간 네티즌'만을 전면에 부각하여 박진영 자신은 자연스럽게 면죄부를 얻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막론하여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병폐이다. 가령 정치인들은 자신들 과오에 의해 지지율이 떨어지면 그에 대해 합당한 논거를 제시하여 정정당당히 위기를 돌파하지 않는다. 대신 삼보일배를 하거나 한강 둔치에 천막당사를 짓거나 그도 아니면 시장통에서 생선 파는 상인을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

일명 감성 정치로 불리는 이런 식의 위기 돌파는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며 책임을 부담하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국면을 전환하는 수단으로 매번 신문과 뉴스를 장식해왔다. 대중의 감성적인 면을 적절히 자극하는 철저한 이성적 전술이다. 그리고 박진영 역시 재범 군 사태에서 정확하게 이 전술을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그것이 박진영 사과문이다.

둘째 소통의 전면적인 거부는 의견 수렴의 기회를 사전에 차단하여 문제가 논의되는 기회를 아예 없애는 전략이다. 아이돌 스타가 공인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을 제쳐둔다 해도 과거에나 지금이나 인기 연예인은 청소년 팬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것은 엄연한 사회 현상이다. 개인의 거취 문제가, 시간과 장소를 특정하지 않고도 다양한 계층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이것은 사회적 이슈로 대응해야 한다. 따라서 연예인의 지지 기반인 청소년 팬들에게 연예인은,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와 동등한 무게를 갖는 공적인 영역이다. 이 때 정책을 결정하는 자와 정책을 수용하는 자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2PM이라는 아이돌 그룹의 거취 문제에 있어서는 사용자인 박진영이 2PM 팬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결정권을 갖는다. 누구를 멤버로 기용할지 어디에서 공연할지 언제까지 활동할지 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관심만을 가질 수 있을 뿐 결정할 권한이 없는 팬들은 박진영에 대해 권력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박진영은 연예인과 팬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적인 영역에서, 약자인 팬의 의견을 수렴하기를 거부하고 문제가 논의되는 기회 자체를 차단했다.

문제가 논의되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마치 문제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예를 들어 쇠고기 촛불 집회는 사안의 중요성에 있어 정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촛불 집회에 대한 전면적 진압과 차단은 차츰 집회와 시위 자체에 대한 차단으로 이어졌고 집회와 시위의 기회가 줄어들면서 뉴스 및 신문에서 다루는 빈도가 낮아졌다. 결국 촛불 집회가 갖는 중요성이 감소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용산참사와 쌍용차 파업도 마찬가지다. 기회의 차단은 중요성의 감소로 이어진다.
팬들의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는 것은 박재범 파문이 공적인 영역에서 다뤄지는 기회를 차단한다. 이 사안이 길게 끌면 끌수록 JYP측이 부담해야 할 문제에 대한 책임이 증가한다. 그러므로 논의 기회 자체를 차단하여 이 사안에 대한 위험요소와 부담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기획사는 여태까지 연예인의 양성에서 마케팅, 거취 문제까지 일방적이며 불평등한 매니지먼트 시스템으로 절대적인 정책결정자 역할만을 맡아왔다. 아이돌 스타와 팬들은 이에 대해 오로지 수용할 뿐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대결 양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 사회는 소통에 서툴다. 한국을 비난하는 것과 그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는 것은 표현의 기회에 있어 동등해야 한다. 다만 그 책임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하는 사안에서 우리는 항상 극단적인 길을 걸어왔다. 사회가, 사회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라면 책임도 함께 나눠져야 할 것이데 결과는 항상 약한 자가 모든 것을 감내한다. 강자와 약자는 절대적이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 필자 역시 강자가 되거나 약자가 된다. 그때마다 권력의 차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한국적인 방식은 위에 열거한 두 가지 방식이다. 문제에 대한 접근이 감정적일 수록,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될수록, 문제에서 촉발한 상처와 아픔은 모두 상대적 약자에게 전가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그래서 나는 박진영의 사과문을 읽고 박진영을 비판한다. 그 사과문은 사과문이 아니며 대중을 기만하는 시나리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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