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환, 그의 노래에게 빚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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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chino053)등록 2009.09.19 16:19
안치환, 그의 노래에게 빚지다

90년대, 나의 이십대는 자해의 날들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한순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해오던 것들을 하지 못한다는 부르조아적 상실감과 실패한 첫 연애를 자책하며 내 스스로 파놓은 동굴로 기어들어가 수음으로 뽑아낸 감정의 분비물들로 나를 더럽히고 있었다. 두 번의 자살이 미수로 그치면서 창문에 쳐놓은 방충망조차도 나를 묶어놓는 창살처럼 느껴졌고 방안을 비추는 햇살에도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안치환을 만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때 처음으로 안치환의 노래에 나의 뼈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흘러 흘러서 물은 어디로 가나 물따라 나도 가면서 물에게 물어 본다 언뜻언뜻 동풍이 불어 새 봄을 맞이했으니 돌돌돌 도랑에 흘러 농부에 씨를 떨며 겨우내 낀 개구쟁이의 발때를 벗기러가지.... "

-물 따라 나도 가면서-

그렇게 세월의 물살에 나를 맡기고 어둡고 축축한 동굴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이 세상 어딘가에 내가 맞서야할 상대와 적셔야할 것들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 세차게 흘러가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날부터 그의 노래는 신발밑창에 숨겨둔 비상금이었고 세상을 향해 뽑아들기로 한 내 무딘 칼을 가는 숫돌이 되어주었다. 태백선 기차를 타고 도착했던 사북, 폐광촌 시꺼먼 물줄기에 손을 담그며 '마른 꽃 다시 살아나' 를 불렀고 경북 구미공단에서 인도네시아, 파키스탄에서 온 외국인근로자(당시 불법체류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음에 뛰어들어 부르스 스프링스턴이나 밥 딜런 같은 가수가 우리나라에도 있다고 그들에게 안치환의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매향리 미군사격장 앞에서의 '매향리의 봄' 광주 5,18기념묘지에서 불렀던 '한다'... ... 그로인해 나의 이십대 끄트머리는 불러야할 이유가 분명한 노래들을 숨이 멎도록 불렀었고 함께 걷던 나의 왼쪽 가슴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못 마신는 술 한 잔 마시고  밤새도록 혼자 흥얼거리던 '나무의 書'

- 나 지금 흘리는 이 눈물은 애타는 목마름이 아니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돌아섰을 뿐이요 나무엔 열가 없어도 가지에 꽃은 피지 않아도 하늘을 우러러 난 부끄럽지 않소 천 년을 살아온 힘 센 팔로 하늘을 품고 비바람 눈보라 이겨낸 뿌리 깊은 나무요 아무도 날 찾지 않아도 누구도 날 부르지 않아도 언 땅 위에 우뚝 선 난 푸른 겨울나무요 -

설령 이 노래처럼 살 수 없다하더라도 정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리라 수없이 다짐 했었다.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노래 대부분의 가사는 詩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옛사랑을 떠나보내는 법과 다시 사랑하는 법도 그에게서 배웠다. 아주 오래 전 사랑했던 사람 -그 사람 잊을 수 없겠죠-에게 그립다고 편지를 쓰다가 그냥 긴 세월이 흘렀다고 만 써놓았다가 -편지  윤동주의 詩- 구겨버리기도 하고 평행선처럼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끝점을 향해-평행선-  찾아 떠나버린 옛사랑을 비로소 놓아주면서 그래 어쩌면 사랑이란 혼자만의 허밍으로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사랑이 찾아왔다.  2004년 나를 '안치환 매니아'인 줄로만 알았다던 아내를 만나 처음으로 새벽을 함께 맞이한 날도 대학로에서 열린 안치환의 콘서트를 보러 간 바로 그날이었다. 그 후로 '사랑하게 되면'으로 그녀의 마음을 두드렸고 '내가 만일'을 청혼가로 불러주며 결혼하게 되었다. 이제 아내도 가끔 노래방에 갈 때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곧잘 부르곤 한다. 나는 여전히 '똥파리와 인간', '아이고 아이고' '귀뚜라미'를 부르고 있고... ...

요즘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도 그의 노래 대신 트로트를 부를 때가 많아졌지만  나팔꽃노래 모임 같은 소규모 콘서트에 가끔 얼굴을 비추는 그에게 시대가 변해버린 탓에 속물근성에 젖어버린 어쩔 수 없는 딴따라로 전락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나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사자는 사냥이 끝나면 발톱을 숨기는 법이다. 한 결 같이 발톱을 세우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역을 과시하기 위한 만행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를 그렇게 믿어 왔고 앞으로 그렇게 믿으며 그의 노래를 기다릴 것이다. 왜냐면 내 인생의 꼭지점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노래에게 나의 이십대가 빚을 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에 빚진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속물이기 때문에 그에게 환호하며 신청곡을 청하지 못하겠다.  그럴 자신이 없다. 그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눈치 보며 쓰는 이 한 줄의 글로 안부를 보낼 뿐이다.

'집 채 만 한 호랑이로 돌아 오니라. 어먼 어먼 돌아와야 헌다....'  - 배웅  중에서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흐린 오후,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노래가 귓가에서 웅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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