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수에 씻겨 내려가는 한기

첫 취재 일기

검토 완료

고혁주(rhkdqkr0414)등록 2009.12.22 11:25
 12월 21일 월요일. 서울역에 노숙자들을 만나보기 위해 왔다. 인턴 기자로서 첫 취재 대상이 노숙자라니, 겁이 났다.

일단 눈치를 살폈다. 역 앞 광장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갈 길을 바쁘게 가는 사람들과 갈 곳이 없어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에 쉽게 말을 걸지 못하고 있다가 순찰을 도는 의경에게 "저들이 난동피우고 그러진 않냐"고 물어봤다. 의경은 "자기네들끼리 술 먹고 싸우긴 하지만 시민들은 잘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자는 여전히 무서웠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노숙자(A)가 지나가던 사람(B)에게 욕을 하더니 그를 곧 발로 차기 시작했다.  피해자는 "예수 믿으라"고 선교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또한 입성이 남루했다. 어떤 노숙자는 소리치며 말렸고 다른 이들은 그냥 두라며 말리는 이들을 말렸다. 남은 이들은 관심이 없었다. 이때다 싶어 구경꾼처럼 순수한 호기심을 보이며 한 노숙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저 사람(맞는 사람)이 나쁜 놈이에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예수 믿으라는 놈이 목사랑 나쁜 짓을 하고 다닌다"며 "얼마 전에는 어린 정신지체 여성을 임신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신학교 나왔지만 여기에 우리 도우러 온다는 종교 단체를 다 믿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와 오래 이야기를 하자 그는 기자를 종교단체에서 나온 사람이냐고 몇 차례 확인했다. 기자는 그저 대학생이고 노숙자들의 삶이 궁금해서 얘기나 들어보러 왔다고 둘러댔다.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던 중 등 뒤 도로에 한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군복 입은 덩치 큰 남자가 내리더니 "누구야? 누가 전화 받았어?"하고 씩씩거렸다. 주위 공기는 안 그래도 추운데 더욱 얼어붙었고 그 '덩치'는 노숙자들에게 욕설을 하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누가 전화 받았냐고!? 누가 나한테 반말 하지 말라고 했어? 너냐? 너야?" 그는 말대답을 하는 자들을 발로 차고 뒤통수를 치며 응징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 그는 B와 차를 타고 떠났다. 아무래도 맞은 게 억울했던 B가 자기 윗사람에게 이른 듯하다.

그는 자주 '인생'이라는 말을 썼다.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이게 인생이다", "이런 것이 삶이다"라고 정리를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고려대 나와서 이러고 있는 것도 인생, 임신한 몸으로 담배 피는 것도 인생, 돈 때문에 아내 몸을 다른 남자들에게 빌려 주는 것도 인생인 것이다.

그들의 인생 이야기는 너무도 길었고 절절했다. 그러나 너무 추웠다. 기껏해야 5시간 정도 있었을 뿐인데. 조선일보 인턴 기자처럼 2박 3일 함께 생활하며 취재할 끈기도 시간도 기자에겐 없었다. 집에 가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은 너무도 따뜻했다. 집에 오자마자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내 몸은 한기를 잊었고 그곳은, 여전히 추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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