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이 떠올랐다! 1960년 3. 15 선거 전후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통통통(通統筒)의 역사 산책 ③]4. 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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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람(pinkaram)등록 2010.03.22 13:09
내년 달력에 표시될 기념일이 하나 늘었다. '3. 15의거 기념일'이다. '3. 15' 뒤에는 부정선거여야 자연스러운데 '의거'라니? 이 글의 끝에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길 기대한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사체,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허종 촬영 ⓒ 부산일보


김주열의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역사는 의심의 여지없이 4. 19 혁명이다. '3. 15 부정선거→4. 19 혁명'이라고 외워 온 역사의 화살표 안에 김주열의 사진이 있었다. 처참한 모습을 한 고교생의 사진이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후 마산 학생과 시민의 '데모'는 질적으로 변화했다. 서울 지역의 대학생과 지식인에게도 영향을 주어 마침내 대통령을 하야시킨 '혁명'으로 전화한 것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정작 그 사진이 발견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 때의 일들은 혁명이 아니라 혁명의 배경으로만 기억되어온 것이다. '혁명' 앞에 붙은 4. 19가 4월 19일 이전의 역사를 전사(前史), 기폭제, 도화선으로 간주하여 혁명의 서사 안에 흡수시킨 것이다. 3월 15일은 부정선거의 날로만 규정되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셈이다. 평범한 고교생 김주열이 왜, 어떻게 눈에 최루탄 박힌 혁명 열사로 부활하게 되었는지 가상의 어느 기자가 취재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1960년 3월 15일. 여기는 마산. 나는 취재를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다.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 죽었고, 대통령은 이미 이승만으로 정해졌다. 선거는 이기붕(자유당)과 장면(민주당)의 부통령 대결이다. 2월 28일 대구에서 자유당이 학생들의 유세 참가를 강요하며 데모는 시작되었다. 3월 2일, 민주당이 자유당 선거 지령을 폭로하였다. 투표개시 전에 사전투표, 3인조 ․ 9인조 조장이 기표 확인, 당원이 완장차고 압박하기, 개표 시 표 흐트러트리기와 바꾸기 등. 서울과 각지에서 "공명선거",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가 어제까지 계속되었다.
오늘 새벽에 장군동 1투표소에서는 민주당에서 선거 전에 투표함을 확인하려고 넘어뜨리니 이미 기표한 투표용지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투표소 길목마다 완장 찬 자유당 당원과 반공청년단원이 진을 치고 있었다. 민주당은 선거를 포기하겠다며 당사 앞에 모인 시민, 학생들에게 시위를 호소하였다. 저녁 7시 반 경 학생들과 시민들이 파출소로 향해갔다.
갑자기 파출소에서 나온 한 방의 총소리. 앞에 섰던 한 학생이 쓰러지자 시민들은 흥분했다. 파출소를 지나 시청으로 가는 행렬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만 명을 넘어섰다. 시청 입구에서 "부정선거 다시 하라", "내 표를 내 놓아라" 하는 소리가 커진다. 소방차 한 대가 데모대에 물을 쏘아대며 헤드라이트를 비추고 데모대는 돌을 던진다. 소방차가 데모대로 돌진하다가 운전사 눈에 돌이 맞았다. 소방차는 전주를 들이받고 시내에 전기가 나갔다. 지금 시각은 7시 50분. 여기저기 총소리가 난무한다. 실탄이다. 실탄 사격 앞에서 시민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부상자는 속출하고 있다.



마산 학생들의 행진 ⓒ 4월민주혁명회


그 후 오늘은 4월 11일. 3월 15일에 죽은 사람이 8명, 다친 사람은 70명도 넘었다. 고문과 연행에도 불구하고 여러 도시에서 중고생의 데모가 계속되다가 대학생으로 이어졌다. 서울에서도 4천여 명이 모여 "3.15 선거는 불법이며 무효다", "살인사건 책임자를 처단하라", "평화적 데모의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는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3월 15일에 있었던 1차 마산사건에 대해 마산경찰서는 "폭동에 관용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치안국장은 "수법이 공산주의자와 비슷하다며 배후에 공산당 게재 여부를 수사중"이라고 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폭동 주도자를 처벌할 것"이라고 했다. 시민들은 자식이 죽거나 다쳤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빨갱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통령이 된 이기붕은 "경찰에게 총을 준 것은 쏘라고 주었지 장난감으로 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시위가 계속되는 날들 속에 오늘 오전 11시 30분. 수사계장이 신포동 부두에 있는 군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시체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나도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시신의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미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와 있었다. 허종 기자가 찍은 사진이 AP통신으로도 넘어갔다. 시신의 신원을 파악해보니 3월 15일에 행방불명 된 김주열이었다.
시신이 옮겨진 마산도립병원으로 이동했다. 시민들은 모여들기 시작한다. 병원 안이 어수선한데, 시청청소부가 관을 빼돌리려고 들어서는 것을 민주당 감찰부의장 이탄희가 막았다. 나중에 그의 말을 들어보니 인부들이 자정 넘어서까지 시체를 이동시키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단다. 김주열의 어머니는 "시체를 가지고 정치해서 되겠냐"며 시신을 가져가겠다고 요구했지만 그것은 경찰도, 민주당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학생들도 병원으로 와서 시신을 매고 행진을 하고자 시도했다. "학살경관 처단하라", "이기붕을 죽여라",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가 시가지에 진동하고 있다.

2010년 3월, 50년 전 3월 15일의 '1차 마산사건'은 국가에서 지정하는 '3. 15 의거 기념일'이 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이전에 마산에서는 이미 부정선거에 항의하고, 친구와 가족이 죽거나 다쳐서 분을 참지 못하는 학생들과 시민이 거리에 나왔다. "투표의 자유를 달라", "협잡선거를 물리치자", "부정선거 개표를 즉시 중단하고 선거를 다시 하라"는 그 날의 외침에서 데모는 이미 혁명이 되어 있었다. 부정선거에 반대하며 혁명이 시작된 그 때 그 사람들의 에너지가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를 만들어 왔다. '4. 19혁명', '4월혁명'이라는 역사용어는 3월부터 있었던 전국 각지 학생들의 시위와 마산에서의 유혈 저항을 담아내지 못한다. 혁명은 4월 19일 단 하루에만 있었던 것도, 서울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1960년 봄의 혁명은 장기적이고 광범했던 저항을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다시 태어나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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