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

영화 <시>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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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minayo)등록 2010.05.2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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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할 것만 같은 시골 중학교에 자살사건이 일어난다. 여학생이 강물에 몸을 던졌다. 영화는 강물에 떠내려 오는 여학생의 시신을 보여주는데 시신이 카메라에 가득 차오를 때 영화 타이틀인 <시>자막이 함께 뜬다. 그 타이틀을 보자 <시>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평온하지도, 부드럽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테니 단단히 각오하라는 당부처럼 느껴졌다.

삶은 이론을 비웃고

예순 여섯의 미자는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를 혼자 키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넉넉지 않은 형편이지만 천성이 선하고 낙천적이어서 늘 미소를 잃지 않는 '할머니'다. 화사한 색의 옷을 즐겨 입고 필수 아이템인 모자로 패션의 끝을 완성하는 멋쟁이 할머니이기도 하다. 꽃만 봐도 배가 부르고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할머니이기에 그녀가 시를 배우겠다고 나선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미자이기에 이제는 지나온 생을 차분히 정리하고 아름다운 시 강좌를 들으며 일생을 마감할 준비를 해도 좋으련만 '인생'은 미자 앞에 젊은 시절에도 감당하기 힘든 과제를 준비해두고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와 에릭슨은 사람은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걸쳐 이루어야 할 생의 과업이 있고 그 과업을 조화롭게 달성해나가며 성장한다고 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노년기는 생을 마감하는 시기로, 이 시기를 맞이한 사람은 지나온 생을 통합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준비하는 단계여야 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실제 삶은 이론을 간단히 비웃고,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길을 예비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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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미자에게 병이 찾아왔다. 알츠하이머. 외래어가 주는 다소 낭만적이고 멋진 느낌. 하지만 한국어로는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인 치매다. 치매는 지나온 시간과 역사를 앗아가고 개인적, 사회적 관계를 지운다. 처음에는 꽃, 바람, 강이라는 명사를 거두어가고 이후에는 향기난다, 흔들린다, 흐른다는 동사를 감춘다.

영화 속 미자의 대사처럼 미자는 그리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다 잊어버리고 싶은 삶도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멀리 있지만, 모든 사소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누는 '영원한 친구' 같은 딸이 있고,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쁨을 주는 손자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아프게 한다. 미자는 자신의 몸에 깃든 병이 조만간 자신을 옥죄어 올 고통이 될 것임을 직감했지만 그 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손자를 통해 오리라는 걸 몰랐다.

강물에 몸을 던진 여학생의 자살이 자신이 사랑하는 손자 때문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을 때 미자의 평화로운 일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시를 배우는 일은 사치가 되기 마련인데 미자는 역설적으로 시를 찾는 일에 더욱 매달린다. 이 영화는 미자가 시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만나는 사람과 사람에 대한 풍경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나

여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여섯 명의 '가해자'의 보호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돌아가며, 학교 안 과학실에서, 한 여자 아이를, 장기간에 걸쳐 성폭행한 일을 '수습'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일은 이미 벌어졌고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이 일을 아무도 모르게, 재빠르게, 없던 일처럼 처리할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한다. 누구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얘기하지 않고(심지어 예쁘지도 않은 아이, 볼품없이 생긴 여자애를 왜 건드렸는가가 궁금하다)죽은 아이 엄마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빨리 이 사건을 '합의'해야 한다는 한 가지 목표 하에 이후 행동을 '절대 통일'해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며 교통사고 합의를 보듯 각자가 부담해야 할 합의금의 액수를 정하는 것으로 행동을 '절대 통일'한다. 누구도 피해자 가족을 만나 용서를 구하거나 사과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사건의 개요를 알게 된 미자는 죽은 여학생을 위해 미사가 치러지는 성당을 찾는다. 용서를 구하자는 심정에서가 아니었다. 그냥, 마땅히 이 죽음을 애도해야 하지 않는가는 인지상정의 그것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성당에 앉아 있으려 했지만 미자는 미사를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그녀는 도망치듯 죽은 여학생의 사진을 챙겨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느끼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

그때부터 미자는 손자의 '가슴'에 노크를 시작한다. 자신 때문에 친구가 자살을 했는데도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을 보며 낄낄대는 손자, 할머니가 왜 그랬느냐고 울부짖어도 이불 속에 숨어버리는 손자, 심지어 성당에서 가져온 여학생의 사진을 식탁위에 올려놓아도 태연히 밥을 먹는 손자, 동네 꼬맹이들과 훌라후프를 하며 장난치는 손자에게 수도 없이 "네가 정녕 무슨 일을 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손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며, 말초신경을 통해 느껴지는 일차적인 자극 외에는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며,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어 정도를 잃어버리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오히려 경미할지 모른다. 통감을 잃어버린 불감증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면. 불감증은 치유약도 없어 보인다. 손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잊어버린, 상식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를 아프게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일 뿐이다.     

미자는 손자 대신 죽은 여학생에게 용서를 구하는 길에 오른다. 그 용서가 시를 통해 올 것이라는 걸 미자 자신도 사실 몰랐다. 용서를 구하러 오른 길에서도 미자는 가끔 실수를 한다. 여학생의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나선 길에서 만난 살구의 일생에 빠져들고(살구는 짓밟히면서 다음 생을 준비한다는 시상), 먹고 살아야 할 이유인 농사가 힘에 부치는 여학생의 엄마에게 시골 풍경이 너무 좋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천진하게 전하기도 한다. 여학생의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음을 뒤늦게 기억해낸 미자는 참담함을 느끼고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무력함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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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서 미자는 타인이 처한 상황과 처지에 '공감'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자신이 간병하던 노인의 터무니없는 요구(죽기 전에 남자 구실 한 번 해보고 싶다는)도 끝내는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다. 몸은 무엇일까. 이제까지의 나를 견디고 지탱해준 고마운 몸, 하지만 때로는 부정하고 싶은 거추장스러운 몸. 추한 욕망도 아름다운 욕망도 몸에서 비롯되고 몸이 느끼는 고통에서는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다. 손가락 끝만 다쳐도 몸의 온 신경은 손끝을 향한다. 그만큼 몸은 지배적이다. 어떨 땐 몸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두려울 정도. 그런 몸과 화해하는 길을 몸의 요구를 다스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미자는 안다. 미자는 더 이상 자신의 몸과 불협화음 하지 않기에 노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길 위에서 상식으로서의 정의도 깨달았다. 사랑하는 손자를 경찰에 고발하는 일이 그렇다. 미자는 손자를 고발하는 행위를 통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고통을 돈으로 합의 보려는 사람들에게 상식으로서의 '정의'를 전한다. 그러나 정작 미자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정의다. 선 자체가 자신이 선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미자는 죽은 여학생이 죽기 전에 걸었을 길도 걷는다. 미자는 여학생에게는 죽음처럼 캄캄하고 무서웠을 과학실을 혼자 찾아가고, 짧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다리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비밀을 간직한 강물을 만나기도 한다. 떠오르는 시상을 적으려 꺼내든 수첩의 백지 위로 시상보다도 먼저 와 닿는 하늘의 눈물을 만나는 미자. 그때 쏟아지던 소나기는 죽은 여학생의 서러운 눈물처럼 보였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이제 그 시의 의미를 조금은 알겠다. 느낌은 감성이 뛰어난 유명한 시인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훈련이 아닐까 싶다. 감정 노동은 '마음 씀'이고 마음을 써야 나와 이웃과 세상이 산다. 죽어버린 느낌을 회복하는 일, 타인의 고통의 귀 기울이는 심성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이창동 감독은 영화 내내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흐르는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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