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에게 보내는 노무현의 편지

유 장관! 나를 넘어 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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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서(jipark2001)등록 2010.05.31 08:59
유 장관…

평소 곱게 받기만 했던 봄 햇살이 오늘 따라 유난히 따갑게 느껴지는 구려.
일 년 가까이 혼자 유유자적 하다, 유 장관이 가져다 준 자서전을 받고서야 그 동안 내가 참 무심 했구나 싶었소. 마냥 여기서 여유를 부리고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다 보니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연락 한 번 못 하고, 이제 이승의 일은 내 몫이 아니다 라는 편한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당신이 보내 준 나의 자서전을 늦게 나마 보며, 이제 고개를 들어 세상사를 다시금 들춰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래서 그런가 보오.
오늘 따라 모두에게 공평히 뻗쳐오는 햇살 마저 도 내겐 편치 않게 다가 오는 거 같으니 말이오.

진심으로 고맙소.
책 제목 '운명이다'부터, 내 친구 문제인 변호사의 인사말 그리고 표지의 여백과 나의 옛 사진까지..
어느 것 하나 모남이 없는 거 같소.
다만, 내가 자서전을 낼 만큼 그렇게 가치 있는 삶을 살았나 하는 수줍음만이 내 마음을 때리는 구려.

유 장관
대통령 취임식 전날 여의도 대중 목욕탕에서 우리가 우연히 만난 걸 기억하지요?
당시 덩치 좋은 경호원이 먼저 나타나 목욕탕을 살피고 내가 알몸으로 호위를 받으며 욕탕에 들어 섰던 일 말이오. 당시, 유 장관의 놀라워하는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오. 그때 욕탕에서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정확 치 않지만, 마치 인생의 험난함을 전혀 겪지 않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처럼 나와 당신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낙관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나오.

그 날 이후 5년, 우린 그때의 낙관을 기억조차 못 할 만큼 많은 일을 겪었지요.
민주당이 분당 된 일부터, 취임 다음날 제출 된 대북송금특검법안, 탄핵, 기적 같던 열린 우리당의 총선 승리,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대 연정 제안 등
그 모든 일을 어찌 내가 다 잊을 수 있겠소. 유 장관이 한 토막 한 토막 자서전에 적었던 것처럼 그 당시의 선택과 어찌 할 수 없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내겐 또렸히 남아 있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변명과 어쩔 수 없었던 무기력 함 만을 얘기 하고 싶진 않소.
비록 탄핵이 있고 난 후 63일 동안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 뒤 국민들은 내게 행정과 의회 권력을 동시에 주었소. 그런데, 그렇게 나를 지지 해 주었던 그들을 위해 내가 과연 무엇을 했나 싶소, 물론 난 나를 지지 해 주는 이들만을 위한 대통령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다시 돌이 킬 수 없는 그 시간과 그 시대의 소명을 띤 대통령으로서 내가 해야만 했던 일, 그 뭔가가 꼭 있었던 거 같소.
그 뭔가가 뭐냐고 물으면 꼭 집어서 얘기하긴 힘들 듯 하오. 하지만, 다시 돌이킬 수만 있다면,
나를 봄날 새벽 부엉이 바위로 오르게 만든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에 대해서만은 우리 국민에게 보여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소.
정말이지, 부엉이 바위의 아픔은 나로서 끝나길 바랬소,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봉화 마을에만 부엉이 바위가 있었던 게 아니었소.
그 부엉이 바위는 서울 도심 한 복판 용산에도 있었고, 검 푸른 서해 바다에도 존재 했으며, 평택 쌍용 자동차에도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았소.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부엉이 바위가 우리 국민의 삶 속에 나타날지 하염없는 걱정뿐이오,

하지만, 유 장관!
당신은 지금의 나처럼 그렇게 넋만 놓고 있진 않을 거라 믿으오.
그래서, 힘겹게 새로운 당을 시작하고 온갖 구설수에 오르면서도 경기도지사 선거에 임하는 게 아니겠소. 한때, 야권 단일화를 못 이룰까 봐 내심 마음은 졸였지만, 김 장관과 유 장관의 현명한 선택에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도 희망을 걸 수 있을 것 같소. 난 그 희망을 이번 4일 발표한 당신의 글 '진보의 단결'에서 엿 볼 수 있었소. "진보의 모든 정치세력이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되는 것, 이것이 역사가 요청하는 최고 수준의 단결" 이라는 유 장관의 글은 비판적 지지 라는 해묵은 논란을 다시 불러 일으킬지는 몰라도 지금의 시대가 다시금 요구 하는 것이라 생각이 드오.
그리고, 당신은 그날 누구도 예상 못했던 곳을 방문 하였소,
평택 쌍용 자동차 노조와 민주노총 경기지부를 말이오, 일부 언론은 유 장관이 예비선거를 위해 '왼쪽 끌어 안기'에 나섰다고 하였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소, 이것이 유 장관 당신의 본 모습이라고 나는 믿고 싶소.
나의 '정치적 경호실장'이 아닌, 나를 넘어서 나아가는 길을 아는 '진보의 단결'을 꿈꾸는 정치인 유시민 으로서 말이요.

유 장관

벌써 오후가 되었구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글이란 걸 쓰려니 몸도 결리고, 오전의 그 편치 않던 봄 햇살이 다시 나를 부르는 거 같소,
이제 딱 두 가지 부탁만 더 하고 편지를 마무리 해야 할 듯 하오,
먼저, 이번 지방선거가 끝나면 내가 변호사 시절 만났던 한진 중공업의 해고 노동자 김진숙 씨를 한 번 만나주오. 그리고, 이 말을 전해 주오.
돌이켜 보면 대통령 재임 시절 내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 했던 거 같다고.
그리고, 아직도 죽음이 투쟁이 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다고 말이오, 그리고, 다음 생애에는 진숙 씨 말처럼 그냥 태생대로 기름 밥 먹는 노동자로 만나자고. 그래서 다시는 서로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서로의 마음이 미어질 일도 없이 만나자고….그래서, 늦게나마 이렇게 사과를 한다고 전해 주시오.

그리고 또 한 사람, 내가 봉화 마을을 떠난 이후로 한 시도 잊지 못한 녀석이 있소.
서은이, 내 손녀 딸 말이오.
그 녀석을 다시는 자전거에 태워 다니지 못하고, 그 예쁜 볼을 쓰다듬을 수 없다는 게 왜 이리 안타까운지..
서은이 생각만 하면 마냥 가슴이 먹먹해 지는 구려. 여기 와서 생각 해 보니 내가 서은이에게 몇 가지 약속을 하고 못 지킨 채로 봉화마을을 떠난 거 같소. 내게서 따로 전갈을 받았다 하고, 서은이가 기억하고 있는 나와의 약속을 대신 좀 지켜 주시오.

유 장관!
또 이렇게 부탁만 하고 신세만 지게 되는 구려. ,
부디 건강 잘 챙기시고, 이번 지방 선거의 승리와 함께 답장을 보내 준다면 더 없이 반가울 거 같소,

2010년 5월 30일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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