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 닮은 '올레', 수줍은 산골소녀 '둘레'

[걷자 둘레길!⑥] -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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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beingawake)등록 2010.08.31 16:50

올레와 둘레. 둘레와 올레.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자매의 이름 같다. 글자수도 두 개, '~레'로 끝나는 항렬 같은 끝말.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 자매라도 확연히 다른 것처럼 올레와 둘레도 둘 다 걷기(트레킹) 코스이지만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낸다.

 

환한 웃음의 해녀, 제주 '올레'

 

이미 잘 알려졌다시피 제주 올레는 서명숙씨가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다녀온 후 제주에 숨겨져 있던 마을길을 발굴해 연결한 걷기 길이다. 서씨가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설립한 후, 2009년 7월부터 코스를 열기 시작했고 현재 추자도까지 제주 올레 18-1 코스를 개장했다. 시흥초등학교와 말미오름으로부터 1 코스가 시작되는데 그로부터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빙 돌게 되어 있다.

 

지난해 가을 시사잡지 한 꼭지에 올레를 소개한 글을 보게 되었다. '놀멍 쉬멍' 갈 수 있고 평화, 자연, 배려를 표방하는 제주 올레의 취지는 내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여자 혼자 걸어도 위험하지 않은 길이라니! 겨울 방학이 되자 바로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서른이 되는 새해를 이틀 앞두고 혼자서 처음으로.

 

올레의 첫 날의 인상은 밝게 웃음짓는 건강한 해녀였다. 너르고 신비로운 색깔의 바다와 구멍 송송 뚫린 검은 현무암 해변. 거센 바닷 바람과 방목된 소와 말, 떠들썩한 관광지와는 또 다른 고즈넉한 마을길이 주는 고요함과 첫날부터 반해버린 버스 기사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까지. 

 

1 코스 출발점인 시흥초교를 가기 위해 시외버스를 탔지만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자꾸 헛갈렸다. 버스 기사 아저씨께 여쭤보니 조금 전에 지나쳐 왔다며 내려서 맞은편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단다.

 

아이고, 시작부터 이런 실수를. 기사 아저씨가 다시 타고 가라며 천 원을 쥐여주셨다. 어리둥절했다. 제주 민심 따뜻하다더니 이런 것인가. 예상치 못했던 실수와 또 예상치 못했던 잠깐이지만 낯선 이의 따뜻한 마음. 소소하지만 이런 게 여행의 재미요 매력인지 싶다.

 

드디어 시흥초등학교 앞. 아, 이제 진짜 출발이다.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쓴 영락없는 도보 여행자 모습을 한 내게 올레를 걸으러 왔냐며 누군가 말을 건다. 1 코스 올레지기라시던 40대 중후반의 남자분이었는데 혹시 문제 생기면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알려주신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가족으로 보이는 또 다른 올레꾼들이 옆을 스쳐 지나간다. 조금 지나자 말미오름이 나온다. 오름, '산봉우리'의 제주 방언인 오름은 야트막한 산이다. 저 위쪽에 나무 하나가 그림처럼 서 있다.

 

곁에 있던 무덤가에는 현무암 돌무더기가 네모나게 둘러져 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오름을 내려오니 파란 문이 보이고 그 문을 지나니, 방목되어 있는 말, 소들이 보인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말, 소를 가까이서 보는 것도 신기하다. 언덕을 오르니 가까이에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그 뒤로는 마을길, 갈대밭, 광치기 해변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쭉 걸었다. 기온이 그리 차갑진 않았지만 바닷바람이 날려갈 듯 거세다. 첫 날 숙소는 홀로 도보여행자에게 부담 없는 찜질방! 뭍에서 살다 제주가 좋아 제주로 오셨다는 찜질방 아주머니와의 담소도 즐겁다.

 

속 깊은 산골소녀, 둘레

 

지리산 둘레길은 2007년 사단법인 '숲길'이 창립된 후 차곡차곡 준비됐다. 둘레길은 2008년 4월에 '지리산길' 시범구간(남원 산내~함양 휴천)개통식을 했다. 산림청이 운영 자금을 대면서 지금은 '지리산 숲길'이 정식 명칭이 되었지만 곧장 오르지 않고 에둘러 오른다는 의미의 둘레길이라는 말은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다.

 

둘레의 매력은 제주의 올레와 사뭇 다르다. 수줍고 속 깊은 산골 소녀의 이미지랄까. 사람과 생명, 평화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제주 올레와 자매라 할만도 하다. 혼자서 떠났던 올레와 달리 둘레는 취재 여행이라는 '목적'을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떠났다. 글쓰기 강좌에서 너덧번 얼굴을 마주한 게 전부라 아직은 어색한 서먹함이 흘렀다.

 

첫날 일정은 운봉에서 출발해 인월까지 간 후, 주천에서 운봉까지 온 팀을 태워서 숙소인 매동마을로 가는 거였다. 하지만 어디 일이 늘 계획한 대로만 되던가. 제주 올레에서처럼 이 곳 둘레에서도 살짝 틀어진 일정과 예상치 못했던 만남은 이어졌다.

 

만나기로 했던 일행이 나타나지 않아 자동차로 주천 운봉 일대를 빙빙 돌았다. 겨우 찾고 보니 둘레길 쉼터에서 막걸리의 흥취에 흠뻑 빠져 노래까지 한 자락 뽑으며 흥겨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홀로 걷는 중이시던 또 다른 여행자 한 분까지 대동하고 계신다. 안전관련 민간단체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50대 남성이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어렸을 적 다녔던 경기도 성남의 한 초등학교 근처에 살고 계신단다. 낯선 이들의 짧은 만남에서 이렇게 공통의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은 친밀감을 급속도로 높여준다. 다음 날 매동마을에서 금계까지로 이어지는 걷기 내내 일행 전부와 함께 내 두발은 둘레길을 만났다. 

 

비슷한 듯 다른 길, 올레와 둘레

 

제주 올레 첫날에서 느꼈던 다채로움이 올레의 한 특징이라면 둘레는 우리나라 가장 깊은 산인 지리산의 깊음을 음미할 수 있는 길이다. 온통 푸른 나무, 산속 마을, 산속 계단식 논 등 지리산의 다양한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걷는 길따라 생겨난 쉼터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일 수 있다는 것도 둘레만의 매력이다. 만나기로 한 일행들이 늦어진다 싶으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막걸리가 있었다.

 

넓고도 깊은 산이 지리산이다 보니 산 등반이 등산 초보자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인데, 둘레길에서는 '등반'이라는 부담 없이도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산길이기 때문에 둘레에서는 등산화가 필수다. 2009년 1월 올레를 처음 걸었을 때는 제주의 눈, 비, 바람을 온통 맞으며 걸었지만 운동화 한 켤레로도 걷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둘레길의 일부 구간은 등산과 다름없는 경사가 있어 운동화로는 무리가 따른다.

 

올레나 둘레 같은 걷기 코스는 여러 마을과 갈래길을 지나기 때문에 도보 여행자에게 안내 표시는 매우 중요하다. 올레와 둘레 모두 최대한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기 위해 길 안내라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고려하여 표시했다.

 

올레길에는 오고 가는 방향에 따라 파란색과 주황색 화살표로 표시돼 있다. 때로는 리본이 대신 하기도 한다. 반면 둘레길에는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든 장승 모양의 나무에 검정색과 빨간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둘레길 어떤 곳은 나무 장승 옆에 좀 더 커다란 이정표가 남은 길을 표시해 주고 있기도 하다. 올레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도 화살표 외에 이정표,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자체에서 관광객의 편의를 먼저 고려한 것이었으리라.

 

올레는 각 코스마다 자원봉사 형태의 올레지기가 있어 길 안내를 해 주기도 하고 도보 여행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기도 한다. 나 역시 1 코스 마지막에서 2 코스 가는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올레지기에게 연락하여 길을 다시 찾기도 했다.

 

둘레에는 인월에 '지리산 숲길 안내센터'가 한 군데 있어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안내센터 직원의 말에 따르면 곧 두 군데 정도의 안내센터가 더 생길 것이라고 한다. 둘레에도 둘레지기 같은 자원봉사자들이 있으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산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중 젊은이들이 거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자원봉사를 할 만한 40대 중반의 사람들을 여기서는 만날 가능성 자체가 낮다.

 

회색의 일상에 지치면 또 길을 나설터

 

올레는 제주도라는 하나의 행정 구역 안에 있지만, 둘레는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를 연결하고 있다. 200km 정도의 구간이 더 완공될 예정이다. 그 과정에서 3개도 5개 시(남원, 구례, 하동, 함양, 산청)에 걸쳐 마을 설명회를 열고 지자체, 마을의 협조를 얻는 행정적인 과정과 절차가 간단치는 않아 보인다.

 

제주도는 이미 잘 알려진 관광지이기 때문에 민박 등 숙박 시설이 이미 자리를 많이 잡고 있다. 반면 둘레길은 길목에 있는 마을에서 새로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산골에 젊은 사람이 없다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 순박한 인심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잠시 마을을 둘러보러 나섰을 때 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못 보던 얼굴이 올라오네?"하고 환하게 웃으셨던 것처럼. 이미 관광객을 맞은 경험이 맞은 제주도보다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덜 지나다녔던 곳이라, 오는 사람들을 모두 '손님'으로 생각해 어렵고 부담스러워하시기도 한단다.

 

둘레길은 길이 지나는 마을 주민들의 양해와 동의로 열린 길이다. 올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행자들이 무책임하게 쓰레기를 버리고 가거나 농작물을 함부로 채취해 가는 바람에 민원이 생기고 길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런 여행객들의 걷기 목적이 궁금해진다.

 

나는 제주 올레를 걸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까이 있지만 무심했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지리산 둘레를 걸으면서는 함께 갔던 이들과 둘레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함을 느꼈다. 넉넉한 지리산의 푸른 기운으로 마음도 정화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걷기 여행의 목적으로 족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회색의 일상은 여전히 일말의 여유 없이 나를 몰아쳐 댄다. 그래도 산내음에서, 바닷바람에서 얻은 기운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때 생각했던 것들을 그냥 기억 창고에 묻어두지만은 않으려 기록도 한다. 언젠가 다시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또 나는 걸을 것이다. 이번에는 가까이에 있는 무등산 옛길로.

2010.07.31 09:26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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