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백두대간, 코엘료식 행복론

[행복한 책읽기 1] <연금술사>

검토 완료

박철민(eurocom)등록 2010.08.20 16:59
시황제의 명령으로 만리장성을 축조했던 진나라 대장군 몽염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간사한 환관이라던 조고의 계략으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많은 산들의 맥을 끊더니 종국에는 이런 최후를 맞는구나.' 라고 한탄하며 독배를 마십니다.

만리장성 축조를 위하여 중국 전역에 있는 그 많은 산과 산들의 맥과 정기를 잘라냈음을 후회한 후, 죽음을 거부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지요.

백두대간의 등골뼈가 송두리 채 잘려져 나가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는 우리 시대 자연에 대한 정책의 천박함과 생각없는 건설행정가들의 탁상공론에 망연해집니다. 또한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산하를 지키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이 동시에 교차되어 침울합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일인들이 우리 산하의 곳곳에 때려 박았던 쇠말뚝의 망령과 부족한 연료를 메우기 위해 소나무껍질을 'V'자로 벗겨내어 송진을 채취하여 이 땅의 많은 소나무들이 상흔을 입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등산을 갈 때마다 등산로 주변의 소나무들을 이러저리 둘러보며 우울해하곤 합니다.

조선의 2대왕 태종도 2차 왕자의 난 때 그의 형 방간의 무덤에 쇠말뚝을 박고 난을 결행했다 하는데, 쇠말뚝이 무슨 결의의 상징 같아 섬뜩합니다. 여하간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가 훼손되는 일은 '이제 그만'하며 훼손자들에게 레드카드를 보여 이 땅에서 추방(?)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산천 곳곳에 겨울처럼 개발의 상흔이 싸늘하니, 자연의 봄은 언제나 오게 될 터인지 암담합니다.

<연금술사>

책의 제목이자, 모든 것은 하나라는 마음 속의 극원인 '자아의 신화'에 대한 철학적 삶의 길라잡이가 연금술로 되살아 난 삶의 지침서. 자연과 마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나침반.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산고수려山高水麗하여 '고려'라 불리었으며, 조일선명朝日鮮明하여 '조선'이라 이름 지어졌습니다. 이 책 "연금술사"는 바로 이 '고려'하고 '조선'한 우리 민족이 읽고 소화하기에 적당한 자양분을 제공하는 청량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연금술과 보물을 찾아나선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의 꿈결 같은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소년과 동반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꿈꾸고, 때로는 방황하여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며, 또 때로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의 연속성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산티아고처럼 자신을 시험대의 한부분에 들게도 하는 마술 같은 산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도전은 항상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되고, 언제나 '가혹한 시험(시련)'으로 끝난다는 귀절에서 우리의 공감대는 쉽게 형성됩니다.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거의 모든 [경구]는 인생과 삶을 깊게 관조한 참으로 지혜롭고 사려 깊은 노인이 젊은 친구들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들려주는 생의 지침서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나 주위의 사건은 아주 우연하게 시작되지만 흥미를 갖게끔 일이 진행되는 지점에 이르면 대개 참혹한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엘료는 이 책에서 시련을 얘기하면서도 해보겠다는 용기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그 용기는 모든 꿈을 이루는 원천임을 강조함으로써 [도전]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는 '나'라는 존재가 비록 내 자신은 잘 모르고 있다고 하여도 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고 새삼 묻는 것이지요.

코엘료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이 책의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주제, 즉 "자아의 신화"는, 굳건하게 제자리에 있어 창조의 원천을 제공하므로 읽는 사람의 감정을 흐뭇하게 조절하는 힘을 발휘합니다.

"꿈꾸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자아의 신화'라는 작가의 믿음은 바로 우리의 삶, 그것입니다.

이 책에서 코엘료는 나르시소스의 전설을 인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머물고 보듬던 '슬픈 호수'까지 소급하여 인용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르시소스가 항상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던 그 호수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고 있을 거라 상상합니다만, 코엘료는 바로 그 호수가 나르시소스의 깊은 눈에 투영되던 호수 자신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슬퍼한다고 말하는 반전을 꾀하는 것이지요.

우리 삶에서 흔히 보는 사람과 사람들 간의 어설픈 인적 교류의 문제점에 대한 코엘료식 지적은 날카로운 비수입니다. 그것은 대개의 사람들은 타인의 취향이나 생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식의 범주 안으로 상대방을 끌어들이려 함으로써 범하게 되는 오류에 관한 것입니다. 자의식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브레이크 없는 자기 독주, 즉 이기심으로부터 원천적으로 흘러나오는 자가당착의 위협적인 발현들에 대한 코엘류식의 독설과 슬기로운 해법은 더불어 살며 깨닫는 모험에 동참하라는 착실한 작가의 현명한 주문입니다.

정녕 우리가 인식하면서도 간과하던 삶의 중요한 화두가 마치 수채화처럼 담백하게, 때로는 아주 편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이 시대와 사람, 그리고 사회의 가벼운 담론을 진지하게 얘기하는 듯한 풍경이 무척이나 살갑게 그려지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이 수채화식 담론주의는 때로 소설을 아름다운 색채로 물들이는 일등 공신임을 우리는 모두 매우 흐뭇하게 잘 알고 있으니까요.

* 나 자신이 원하는 바는 항상 안고 살아가야 해--삶의 지침은 실패를 모릅니다.
* 성인 마호메트의 다섯 가지 교훈--곧 이슬람교도들의 지침에는 숭고미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 신은 오로지 한 분뿐이라는 것.
둘.    하루에 언제나 다섯 번씩 신에게 기도하라는 것.
셋.    라마단 기간에는 반드시 금식하라는 것.
넷.    나보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항상 자비를 베풀라는 것.
다섯. 일생에 단 한 번 반드시 그들의 성지 '메카'를 순례하라는 것.

종교적인 믿음이 약한 사람으로서 이슬람교도들의 지침과 또 그 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함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맹신이 아닌 범주의 보통 사람으로서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한 믿는 이들의 자세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사람에게 있어 종교행위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이 만든 의지하고 경외할 어떤 다른 세계에 대한 하나의 약속의 되고, 동시에 구속되는 그 어떤 것이라는 생각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프로테스탄트나 이슬람식 종교관과 과학문명의 충돌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산티아고가 크리스탈 가게에서 성공한 것은 자신의 노력도 중요했겠지만 크리스탈이라는 사물도 산티아고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했음을 상기해주면서 이야기의 등장인물이자 또다른 화자인 영국인이 들려준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은 참으로 많은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렇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소통의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자신들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우리 인간에게 그들의 상ㄴ황과 모습을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눈을 감고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연금술사는 꿈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꿈을 찾아나서는 매순간은 신과 영겁의 세월을 만나는 순간이라네. 하루하루의 알찬 순간 속에 그 영겁의 세월의 무게가 깃들어 있지."

그러면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 눈의 존귀함은 또 이렇게 반추합니다.

"눈은 영혼의 힘을 보여주는 도구" 라고.

우리 인간들이 갖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대해서도 코엘료는 친절한 언급을 아끼지 않습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지 못할 때 느끼는 인간의 본능적 두려움'부터 '목숨이나 현재 갖고 있는 것, 또는 일자리처럼 현시적인 갖고 있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까지.

뒤에 두고 온 것이나 사물에 집착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허무적 두려움은 그 종류도 많습니다. 고통과 그 고통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두려움, 코엘류가 얘기하는 결정적인 두려움은 '자아의 신화' 즉 연금술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의한, 두려움을 위한, 참 두려움을 꺼낼 때는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두려움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의 근원적 실체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에 대한 처방은 어디에 있을까요? 코엘료는 우리네 삶과 세상의 역사에 '神'의 커다란 손으로 기록된 믿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 처방의 단서를 제시합니다. 하나인 모든 것들 속에는 '만물의 정기'가 흐르고, 그 정기 속에 두려움에 대한 처방이 영원히 새겨져 오랜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어 우리 주위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상기시키는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의 힘도 결국 만물의 언어 속에 모두 용해되어 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네 본능적 삶과 사랑에 대한 두려움도 그 안에서 편하게 쉴 수 있음을 자상하고 명쾌하게 진단합니다. 이마를 짚어가며 미소 짓는 잘생긴 의사의 친절한 병세 설명처럼 두려움의 실체에 대한 코엘류식 해법은 비교적 간단하고 상쾌합니다.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네. 자, 그대 아직도 두려운가."

이집트에서는 풍뎅이가 '신'의 상징이고, 곰 토템인 우리에게는 곰이 우리 배달민족의 상징이듯이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길고 긴 여정에서 '신'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산티아고는 모든 보물(가진 것들)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보물 즉 '자아의 신화'가 자기 마음속에 있음을 자각합니다. 결국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 없는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찾아 자신을 다듬는 일 속에서 '연금'으로 갈고 닦은 참되고 진실한 보물을 건져 올려야할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는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 주니까요."

* 연금술이란?

어떤 종류의 금속을 아주 오랜 세월 가열하면 그 금속 특유의 물질적인 전부 발산 되고 그 자리에는 오직 만물의 정기만이 남는데, 액체 상태일 때는 불로장생의 묘 약이 되므로 연금술사들은 결국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며 고체상태일 때 는 철학자의 돌이 되어 불꽃처럼 자신을 점화하는 상징이 되니, 결국 이 최종 물 질(그것이 금덩이가 되었든 단순한 돌이 되었든)은 모든 사물의 의사소통을 가능 하게 해주는 언어이므로, 이 물질을 통해서만 자신이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함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만물의 정기", 즉 "자아의 신화"의 궁극적인 도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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