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를 쉽게 이야기하지 말라

샘물 교회의 국가 상대 소송건으로 생각해 보는 봉사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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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bluestag)등록 2010.09.01 10:11
필자가 속한 열린치과의사회에서 8월 초 쯤 베트남으로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

.국내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한지 10년이 넘는 노하우에 해외 진료 자체만으로도 1년 넘는 준비기간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껴져 봉사의 효율성을 위해 이번에는 해외 의료 봉사의 경험이 많은 하우의료봉사단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

이번 샘물 교회 희생자의 국가 소송건을 보면서 2년 전 선교 봉사를 위해 떠났던 그들의 모습을 통해 봉사의 의미와 그 어려움에 대해서 한번 쯤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100원이라는 돈은 당시의 나에게는 큰 돈이었지만 동생을 위해 과자를 사온다면 몇배의 보상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과연 이것을 선행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일까? 교회에서 얘기하는 선행과 믿음의 이유는 죽은 후의 천국행을 위해서이다. 후에 있을 포상을 목적으로 하는 봉사는 선행일까 아니면 단순한 투자일까. 만약 천국이라는 것이 사람을 착하게 살도록 하기위한 신의 악의없는 거짓말이었다는 가정을 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양심을 지킬 이유가 없어지는 건가? ⓒ 오마이뉴스 사진으로 교체 부탁드립니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에서 돌아왔더니 어머니는 외출하셨고 가정부 누나와 4살 어린 여동생만 집에 있었다. 유달리 오빠를 따르던 동생은 필자를 보자마자 새우깡을 사달라고 칭얼거렸고 귀여운 동생의 부탁에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나가 당시 하루치 용돈에 해당하는 거금 100원을 들여 새우깡을 한봉지 사왔다.

위의 행동이 선행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답은 절대 아니다다. 이건 어린 나이치고 지나치게 영악스러웠던 필자의 잔꾀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이가 둘이나 있는 집이기에 당연히 간식거리가 있었을 것이고 없다하더라도 가정부 누나에게 돈을 받아서 과자를 사오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다녀오는 수고 외에는 딱히 얻는 것이 없다. 하지만 내 용돈을 털어서 동생에게 과자를 사준다면 보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날 저녁 아버지로 부터 과자 값의 10배에 해당하는 1000원짜리 지폐를 엄청난 칭찬과 함께 받았으며 그 후 며칠 동안 어머니로부터 착한 오빠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동생을 위하는 마음도 있기는 했겠지만 위의 행동은 거의 확실시 되는 보상을 기대한 명백한 투자 행위였다.

당시 아프카니스탄에 봉사든 선교든 좋은 일을 하러 떠나신 분들과 떠나도록 하신 분들께 묻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그들이 아프카니스탄에서 하려고 한 일은 어려운 이를 돕기 위한 신념의 발현인지 그렇지 않으면 죽은 후에 신을 알현했을때 신께서 주실 포상과 천국을 위함이었는지. 혹시 순교도 불사하겠다며 유서까지 쓰면서 떠났던 아프카니스탄행의 진짜 목적이 생명을 걸 만큼 크게 잃으면 훗날 크게 주실 것이라는 조금은 황당한 계산적 믿음 때문은 아니었는지.

교회에서는 오늘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쳐댄다.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대로 착하게 사는 것은 분명 매우 훌륭하고 선한 일이다. 하지만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렵고 천국에 가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다면 과연 그것이 선행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인지 의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투자일 뿐 결코 선행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샘물 교회 봉사 활동의 문제점은 이것 뿐이 아니다. 봉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다. 필자가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열린 치과의사회의 봉사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노숙자들의 치아를 봐주는 일이었는데 아직 면허증이 없는 관계로 직접 진료는 못하고 진료 하시는 선생님들(주로 아버지) 옆에서 도와드리고 환자에게 설명해 드리는 역할을 했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생각과 남들 앞에서 흰가운을 입는 다는 우쭐함에 한창 기분이 들떠서 50대 초로의 남자분한테 틀니를 끼워드렸더니 이 환자분 한테 돌아온 말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공짜로 만드는 것이긴 해도 너무 성의가 없는 것 같네. 기왕 좋은 일 하는 거면 잘 만들어 주면 더 좋지 않겠어?"

순간적으로 얼굴이 벌개지면서 울컥한 필자. '감히 노숙자 주제에' 남이 기껏 만들어서 끼워 줬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돈 한푼 안내면서 힘들게 만들어서 끼워주면 고맙게 여기고 쓸 생각을 해야지, 어서 생트집이야 생트집이. 거기에 나이 몇살 많다고 진료실에서 의사(는 아직 아니지만 그렇게 보이는 사람)한테 반말을?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지간하면 자애로운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으려 애썼겠지만 너무 의외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시뻘개진 얼굴에 씩씩거리고 있던 필자를 발견한 아버지가 조용히 소매를 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무시고는 불을 붙이시고 한대를 다 태우시는 동안 부자간에는 어색한 침묵 많이 흘렀다.

"봉사란 어려운 거다. 저 환자가 왜 화가 났는지 아니? 저 사람인들 여기(노숙자 쉼터) 좋아서 들어오지 않았을 거고 돈 안내고 진료 받으면서 마음이 좋지도 않을거야. 아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그런데 한참 어린 니 행동은 하나 하나가 수여자로써의 우월감이 보이더라. 좋은 일 하는 건 좋은데 받는 사람이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면 그건 이미 봉사가 아니란다."

그들이 거기서 봉사를 했는지 선교를 했는지 여부로 논쟁할 마음은 없다. 단지 도와주러왔다는 명분이 현지인들에게 목숨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슬람의 전통을 이런 방식으로 짓밟을 권리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다. 도움 받을 사람들이 처한 입장이나 중시하는 가치관에 대한 어떤 이해도 없이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자신들의 생각에 반드시 동조할 것이라는 그들의 잘못된 확신이 있는한 진정한 봉사는 불가능 하다는 이야기다. 경제적인 부국이라는 우월감으로 상대에게 자신들의 가치관을 전파하려는 속셈은 또 하나의 문화적 폭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슬람을 모욕한 이들이 나눠주는 식량과 의료 서비스를 살아 남기 위해 차마 거절하지 못할 아프카니스탄인이 느낄 감정이 과연 고마움일까. ⓒ 싸이월드(오마이뉴스 사진으로 교체 부탁드립니다


조용히 말씀하시고 앞서 들어가시는 아버지를 차마 따라 들어 갈 엄두가 안 섰다. 너무 너무 부끄러웠다. 그랬다. 데이트 약속도 없기에 기껏해야 집에서 온라인 게임이나 할 주말 오후 몇시간 내서 아버지 따라 나선 주제에 나는 그들에게 무슨 대단한 것을 제공하는 듯한 태도로 소리 없이 생색을 냈었다. 뭔가를 줄 수 있다는 상대를 낮춰 보는 우월감과 함께 단순히 이를 고치는 것을 넘어서 마치 그들의 나태함과 나약함 까지 함께 고쳐줘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편견에 가까운 사명감까지 아울러 갖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하철 출구에 앉은 걸인에게 동전 몇개 던져주면서 큰 선심쓰는 양 '힘내세요.'라며 어꺠를 두드릴때 느꼈던 자기 만족과 뭐가 달랐을까. 그 노숙자 아저씨의 항의는 굴욕감이 느껴진다해도 차마 봉사자의 태도를 따질 수 없는 입장이셨기에 진료 결과를 문제삼는 우회적인 것이었으리라.

봉사란 어려운 것이다. 받는 이에게 굴욕감을 주어서는 안된다. 받는 이로 하여금 자립할 의지가 사라질 정도로 지나쳐도 안된다. 책임감을 가지고 꾸준해야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봉사는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받는 이가 어려움에 처하게된 상황도 충분히 이해하고 벗어날 수 있는 지원을 해야만 한다. 상대로 하여금 감사나 존경 또는 경제적인 보상 같은 것을 원해서도 안된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도움을 빌미로 상대에게 자신의 문화나 가치관을 직간접적으로 강요 또는 주입하려 해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봉사는 봉사가 아닌 미끼 또는 투자가 되어버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미국은 세계 여러나라에 인도적인 식량을 제공해 줬고 외침에 맞서 대신 지켜주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차례의 예외도 없이 미국에게 돌아온 것은 '양키 고 홈' 뿐이었다. 중국의 고사 차례지식(嗟來旨食)(*1)에서 볼 수 있듯이 올바르지 못한 방식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받은 사실은 상대로 하여금 원한으로 남게될 수도 있다.

봉사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아무나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잠시 재미삼아 다녀와서는 자기 위안을 느낄 바에는 차라리 금전적인 기부로 끝내는 것이 좋다. 한 사람의 인생자체를 품어주려는 각오와 책임감 없이 떠나는 일회성 이벤트는 결국 걸인의 손에 쥐어주는 동전 몇닢 이상의 선행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번 아프카니스탄으로 떠났던 봉사자들이여 과연 그대들은 아프카니스탄 인들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이 있게된 전후 사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얼만큼의 책임감을 가지고 떠났던가?

아프카니스탄의 현지 치안 상태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이슬람을 포함한 모든 종교에대한 선교활동이 금지인 아프카니스탄의 법률 조차도 몰랐던 그들이 아프칸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과 아픔을 나누는 진정한 봉사가 가능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경제적인 부국 소속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빵 몇조각과 링겔 몇병을 미끼로 자신들의 종교와 가치관을 상대에게 심어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자기 만족 뿐인 봉사가 아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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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샘물 교회 관련 소송 뉴스를 접했을 때 이 기사 만큼은 직접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난 3년간 필자로 하여금 인터넷 기독교에 대한 깊은 회의를 안겨주었던 장본인들이니까. 이제 시간이 지나 그들을 대할 때 적대감 보다는 자식 잃은 부모의 아픔이 먼저 생각나는 지금의 필자가 故 심성민씨의 유족에게 드릴 말씀은 한가지 뿐이다.

이타적인 목적으로 생을 마감한 아들의 이름과 그 아들이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대들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면 신을 위해 생을 버려 구원을 얻었을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죽은 후 천국에서의 만남을 기대하라. 기독교의 신앙을 버렸다면 국가를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감안이설로 유혹하여 그대들의 소중한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이들을 상대로 소송과 보상을 요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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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례지식(嗟來旨食) - 옛날 중국에 큰 기근이 들었을때 검오(黔傲)라는 자가 길가에 음식을 차려 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때 먼 곳에서 왔는지 남루한 기색에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 갈 듯 지친 이가 검오의 앞을 지나갔다.

검오가 말하길

"차래지식(嗟來旨食)(정확한 해석은 '쯧쯧 와서 먹게'이지만 문맥상으로 볼때 어서 와서 쳐먹기나 해라 정도로 해석 됨)"

그 남자가 말하길

"나는 차래지식을 먹지 않았기에 이리 지친 것 뿐이라오.(즉 굶어 죽을 지언 정 혀를 차면서 먹으라는 식의 대접은 받지 않겠다는 뜻)"

이에 검오가 사내에게 자신의 무례를 사죄하고 거듭 먹기를 청했으나 사내는 끝까지 음식을 거부하고는 결국 힘이 다해 죽고 말았다.

좋은 뜻으로 어려운 이를 도우려 할 때 일 수록 더욱 예의를 갖춰서 상대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봉사라는 교훈을 담은 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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