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해답은 원칙에 있다.

체벌 금지 논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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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bluestag)등록 2010.09.01 11:05

체벌이 없어진 이후로 학생들 다루기 여려워졌다는 교사의 넋두리를 들을 때마다 화산고의 명대사가 생각납니다. "송학림, 넌 싸움을 없앴던 것이 아니야. 간신히 막고 있었을 뿐 이지." ⓒ 사진 교체 부탁 드립니다.


요즘 학교에서의 체벌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교권이 무너졌다.' '청소년 범죄가 나날이 흉폭해 진다.' 같은 기사도 나날이 식상해지는 추세의 원인은 체벌에 있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학교의 혼란에 관한 기사에서 교사를 인터뷰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체벌이 없어진 이후로 아이들 가르치기가 너무 어렵다.'는 하소연이 더군요. 이 말 한마디에 한국 교육의 현주소가 다 나타나 있습니다. 체벌이 없어져서 아이들을 가르치지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은 체벌에 의해 겨우 겨우 유지되어 왔다는 것,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 동안 해 왔던 것은 동물의 조련이지 사람을 교육한 방식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매가 무서워서 말을 듣고 매를 맞지 않을 때는 지도가 통하지 않는 다면 과연 그 동안의 교육이 정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까요.

저는 개인의 양심을 믿고 맡기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따르기만 해도 원할하게 흘러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구축된 사회가 훌륭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양심과 판단에 맡기기에는 각자에게는 너무나 많은 사정과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럼 현재 우리나라 학교의 시스템은 어떻습니까? 유명 무실한 교칙과 유전무죄 무전유죄식의 처벌 그리고 너무나 많은 의무와 권한을 가진 교사들.

불합리한 상황 해결을 위해서는 공교육의 목표가 지덕체를 완벽하게 갖춘 전인을 길러낸다는 허황된 것에서 시민으로써 꼭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요. 결혼한 부부가 만나서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서로에게 맡는 방법으로 상대를 바꿔가는데도 길게는 수십년이 걸립니다만 과연 길어야 3년의 기간 동안 교사가 학생의 인생을 결정 지을 변화를 만들어 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를 놓고 서로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 왔기 때문에 교사도 학생도 지쳐갔던 겁니다.

교사는 공무원으로써 자기 직분만 다 하고 거기에 맡는 평가와 급여를 받으면 그 뿐 입니다. 교사의 인사 교과를 평가하는데 담당을 맡은 학생의 징계 유무, 대학 진학률, 서울대 입학 학생 수 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을 쫓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교사 역시 사람이니 당연히 그럴 테죠. 학생을 지도하는 방식 역시 자신의 인사 교과에 유리한 방식으로 진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학생이 잘못을 하더라도 교칙대로 처벌하기 보다는 몇대 때리고 넘어가거나 덮어버리고 쉬쉬하기 급급한 것 역시 자신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제 알걸 다 아는 학생들이 그런 상황을 모를 거라 생각합니까? 어차피 자기 밥줄 지키느라 원칙대로 처리하지도 못할 거면서 몽둥이만 휘두르는 교사를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잘못을 한 학생에게는 체벌을 가할 것이 아니라 교칙에 의거해서 처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이 받은 징계로 인해 담당 교사가 불이익을 받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잘못을 했을 때 체벌을 하는 방식은 '걸려도 몇대 맞고 넘어가면 그만'이라는 준법 정신의 부재와 '목적이 올바르면 폭력이라는 수단을 써도 된다.'는 인권의식의 부재를 낳게 됩니다. 교칙을 어기면 거기에 맞는 처벌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교사의 권위도 서고 학생 역시 시민으로써 갖춰야할 소양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학생을 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칙 역시 문제 입니다. 교칙에는 학생의 의무 뿐 아니라 권리 역시 명시 되어야 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호소할 수단 역시 명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법률 처럼 명확한 이유와 규정을 명시해야지 '학생 다운 두발과 복장' 같은 두루뭉실한 규정이나 학습 능률과 머리 길이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한 어떤 근거가 없음에도 기존에 해왔다는 이유로 짧은 머리를 강요하는 식의 악법은 없어야 겠습니다.

그리고 교칙을 만드는 과정에 학생회 역시 결정권자로는 어렵겠지만 입안자로라도 참석하도록 하는 것 역시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의 일환일 것 같습니다.

학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사회 생활에 적합한 시민을 키워내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학교는 상위 학교로의 진학을 통한 번듯한 명함을 얻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담임을 맡은 학급의 대학 진학률(중학교의 경우 고교 진학률)과 서울대 입학 명수(중학교의 경우 특목고 입학 명수)를 교사의 능력처럼 여기는 세태 역시 현재 학교 교육의 파행의 큰 원인입니다.

30년 전의 사회였다면 명문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은 상당 부분 보장 받았습니다. 졸업 후 대기업 입사 그리고 평생 안정적인 근무와 은퇴 후의 안락한 노후. 하지만 지금도 그렇습니까? 설령 명문대를 졸업했다 하더라도 안정적으로 보장 받는 부분은 이전과 비교할 수 조차 없습니다.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학교 졸업장은 경제적인 안정 측면에서는 약간의 확률만 높힐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면 뿐 아니라 행복의 질까지 생각한다면 그 의미는 더욱 떨어지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가장 큰 목표는 대학 진학률 특히 명문대 진학률에 맞춰져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특별 대우를 받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이미 '쓴맛'을 톡톡히 느껴야만 합니다. 그 어느 곳 보다도 평등해야 하는 학교에서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일까요?
학교 내 모든 학생들의 목표를 명문대 진학에 맞춰 놓고 그 실적에 따라 교사를 평가하고 교사는 그 실적을 위해 학생을 지도하는 비극. 공부를 못 하는 이유로 무시 당하는 학생이 느끼는 소외감  역시 심각한 문제지만 공부를 잘 해서 특별 대우를 받는 학생들 또한 친구들에대한 미안함과  스스로를 향한 교사의 관심이 '스파르타쿠스' 를 향한 주인의 애정 이상이 아님을 아는 이유로 행복하기 힘듭니다. 이후 사회에 나가서도 한쪽은 스스로에대한 패배의식으로 한쪽은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사실 해답은 간단 합니다. 학교의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학업에 뜻이 있어서 명문대를 가기 위한 학생들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 하는 이에게만 쏟던 에너지를 줄여서 학업에 뜻이 없거나 다른 비전을 가진 학생들이 자신의 비전을 찾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 역시 도와줘야만 합니다. 공부를 잘하면야 좋겠지만 설령 공부를 못 한다하더라도 너는 절대로 루저가 아니다. 단지 다른 쪽에 재능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어쩌면 너는 강남의 아파트는 평생 소유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살고있는 아파트의 평수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니까 절대로 기죽지 말거라. 지금부터 니가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을 선생님과 함께 찾아보자. 이런 것이 올바른 교육 아닐까요?

학생들에게 원칙을 지키는 준법 정신과 스스로의 인권에 대한 자각을 통한 다른 이의 인권도 소중하게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배우고 각자가 행복할 수 있는 저마다의 다른 길을 찾도록 도와 주는 것. 올바른 상식을 가진 행복한 시민을 키워내는 것. 이것이 바로 학교의 기능입니다.

얼마 전 한 교육위원이  "인권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간 다음부터 찾아도 안 늦는다."라는 발언을 하셨다고 하네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기 전에는 인권이 없다 즉 인간이 아니라는 말. 사회가 학교가 청소년을 인간으로 취급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닐까요?
덧붙이는 글 딴지일보 독자투소 게시판에 개제 했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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