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비서도 없이 나타난 노무현

수행비서도 없이 나타난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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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석(hskimpro)등록 2010.09.06 11:08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내게 빚이다. 난 아직도 그이에게 갚지 못한 빚이 있다. 그리고 그 빚은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 갚아 나가야할 결코 비워지지 않는 화수분일지도 모른다. 난 소위 말하는 친노도 비노도 반노도 아니다. 단지 인간 노무현을 마음 깊이 존경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 분은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소탈하고 진솔한 정치인이었다.

 

 

 

 

난 처음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건데 그를 대수롭지 않게 봤다. 어쩌면 나 역시 일류대를 졸업하여 세상을 학력으로 재단하는 위선적 지식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16대 국회가 개원되었다. 난 초선의원이 되었다. 정치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지역 현안에 대한 민원이었다. 지역구에만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지역 문제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마을을 방문해 보면 마을마다 숙원사업이 있었다. 모두들 진지하고 나름대로 다 억울했다. 그러나 난 그 분들의 억울함이나 민원을 해소해 줄 힘이 없었다.

 

 

 

 

정치 초년생인 나에게는 계파도 조직도 없었다. 초선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정책을 만들고 법을 만드는 일이 전부였다. 그로인해 법안 발의 1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법안 발의 1등이 지역민원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숙제를 못했으니 주민들 보기가 미안스러워 지역을 다시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힘이 없어 어떻게 국회의원을 계속할 것인가 회의감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민주당 제 2정조 위원장으로 발탁이 되었다. 당시 정책의장인 김원길의원이 경제 분야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으나 워낙 오랜 기간 의장을 맡아와 새로운 참신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지도부가 판단한 것 같았다. 마땅한 후보감을 찾다가 원내에 경제전문가가 몇 사람 안 된데다가 이론과 실물경제에 능통하다는 장점을 평가해 나를 발탁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지금은 국회에 정조위원회가 6개나 되고 정책의장 산하에 부의장을 몇 명씩 두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부의장 제도가 없었고 정조위원회도 3개 밖에 없었다. 제2 정조위는 9개의 경제부처를 총괄하고 있었는데 정책의장인 임채정의장은 경제분야의 정책을 사실상 나에게 맡겨 주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정책정당으로써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가 쇄도하고 어느덧 나는 잘 나가는 초선의원이 되어버렸다. 비로소 정치에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들이 차근차근 떠올랐으며 민원을 해결하는 방법들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난 제 2정조 위원장으로서 민주당의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펼쳐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16대 대통령 후보 경선이 민주당에서 시작되었다. 민주당은 이인제 후보가 가장 두각을 나타내며 이인제 대세론이 당 안팎을 뒤 덮고 있었다. 이인제 후보는 나와 대학동기여서 그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나는 이인제 후보캠프의 정책의장을 맡았다. 나는 그 일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경선은 요식행위에 불과했으며 이인제 후보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될 것이라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이인제 후보를 돕는 일이 바로 대선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노풍이 불기 시작했다. 미풍으로 시작한 바람은 결국 태풍으로 변했다. 속수무책이었다. 그야말로 추풍에 낙엽처럼 이인제 대세론은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인제 후보는 경선포기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정의 밤 나는 현장에 있었다. 분위기는 격앙되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경선포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경선포기는 지금까지 만들어 온 이인제라는 정치인의 위상을 한꺼번에 사라지게 하는 일이었다. 나는 참모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강하게 경선포기를 만류하며 후보를 질타했다. 하지만 내 의견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자리를 떠야만했다. 이인제 후보의 집을 나설 때 옆에 함께 있던 한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 김의원, 옳은 소리긴 하지만 참 그 말 한 번 모질게 합디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칙에 관한 문제였다. 결국 노무현 후보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마음이 찹찹했다. 그와 단 한 번도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들리는 얘기와 보이는 모습으로만 판단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후보가 된 이상 그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그것이 당원의 의무이자 정당인의 자세라고 믿었다.

 

 

 

 

나는 2 정조 위원장으로서 나름의 경제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와 깊은 만남은 거의 없었다. 후보 또한 나를 찾지 않았고 나 역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매섭게 불던 노풍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빠지더니 나중에 가서는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지지도는 갈수록 곤두박질 쳐 노무현 후보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당 안과 밖에서 후보를 무섭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특히 후단협이 후보 흔들기의 중심지였다.

 

 

 

 

나는 당시 중개포(중도개혁을 지향하는 포럼)의 회원이었는데 중개포는 60여명의 의원들이 가입된 원내 최대 연구 단체였다. 중개포의 대부분의 의원들이 후단협에 가입했다. 그리고 후단협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난 그 자리에서 내 입장을 밝혔다.

 

 

 

 

" 당원들에 의해 선출된 후보를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해서 바꾸는 일은 결코 민주적인 절차가 아닙니다. 나는 노무현 후보의 사퇴에 대해서 결코 동의하지 못합니다.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두 번 다시 후단협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던 많은 선배 의원들이 그런 나를 더러는 원망하고 또 한편으로는 뜻을 함께하자고 구슬렸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정치를 그만두었으면 그만 두었지 원칙이 아닌 일에 찬성할 수는 없었다. 민주당은 안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홍삼 게이트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도가 급락하자 결국 대통령은 민주당을 탈당했다. 중심을 잃은 민주당은 후단협파와 노무현후보를 지지하는 세력 그리고 중도적인 재야세력들이 각자 계파의 입장에 맞추어 정국을 해석하고 진단하며 목소리를 높여 싸우고 있었다. 나는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대선을 앞두고 정책을 가다듬고 준비하는 일 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2002년 9월 어느 날, 민주당은 정부를 불러 정책협의를 가졌다. 그날 협의 의제는 '아파트값 폭등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아파트 값이 일시적으로 크게 상승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나는 과잉 유동성이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현 상태를 방치했다가는 경제적으로 큰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따라서 아파트값 폭등을 잡기 위해 금리인상 등 긴축 재정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정부는 미국경제 불안 등을 이유로 금리인상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난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현재의 부동산 투기억제를 위해선 금리인상도 필요하며 우선 콜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통화당국 관계자들을 불러 당 입장을 설명할 방침입니다"

 

 

 

 

정부는 나의 발언을 무척이나 못마땅해 했다. 그 이유는 금리인상은 일반적으로 '대단히 인기 없는 정책메뉴' 이기 때문이다. 금리가 오르면 은행돈을 많이 쓰는 기업이나 가계에 부담이 돌아가고, 주가에도 마이너스 작용을 한다. 그리고 당시는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미국경제 등 대외요인이 여전히 불안한데다가 금리를 올릴 경우 전경련, 대한상의 등이 거세게 반발할 게 불을 보듯 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말대선을 앞두고 신경 안 쓸 수 없는 주가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주요 고려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선거가 코앞에 있다하더라도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정책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길이 훨씬 더 국민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었다. 결국 그 날 나의 발언은 한 언론사에 대문짝하게 실리고 말았다. 선거를 앞두고 여당의 정책 책임자가 금리인상을 언급한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라는 기사였다. 그 다음날 당시 후보 비서실장인 정동채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 김의원님, 후보께서 뵙기를 요청합니다."

 

 

 

 

만나보나마나 빤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의 정책을 관장하는 제 2 정조위원장이 선거를 앞두고 표 떨어질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발언했으니 기분이 좋을 후보가 어디 있겠는가. 일단 만나서 내 의견을 얘기하기로 했다. 난 국회 앞 식당에서 노무현 후보와 처음으로 독대했다.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었다.

 

 

 

 

약속 장소를 갔는데 아무 수행도 없이 후보가 혼자 나와 있었다. 사실 좀 많이 놀랐다. 그래도 명색이 정부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수행비서도 없이 털레털레 식당을 혼자서 들어 선 것이다. 노무현 후보는 예의 그 함박웃음을 담고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에둘러 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게 물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그 날 내 발언이 문제였다.

 

 

 

 

" 함 물어봅시다. 김의원님,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제가 좀 궁금해서요. "

 

 

 

 

큰 눈을 끔벅거리며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적의도 그렇다고 호감도 표시하지 않는 지극히 담백한 눈이었다. 제법 많은 말을 한 것 같다. 그러나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충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 선거 때마다 자금을 풀고 경기 부양책을 쓰면 일시적으로는 경기가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큰 후유증을 겪는 사례가 많다. 난 후보가 경제를 견조하게 끌고 나갔으면 좋겠다."

 

 

 

 

내 말을 다 들은 노무현 후보는 빙긋 웃더니 시원하게 말했다.

 

 

 

 

" 뭐, 그렇게 합시다. 선거는 선거고 경제는 경제입니다."

 

 

 

 

순간 뒷골이 띵했다. 난 후보가 분명 나를 힐책하는 반대의견을 얘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응할 말까지 준비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선선하게 나의 말에 동의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 아, 이 사람 괜찮은 사람이구나. "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참 신선한 충격이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자신에게 불리할 지도 모르는 정책을 선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무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옳은 일은 무조건 옳은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영남에서 콩이면 호남에서도 콩이었던 것이다.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않고 국민을 위한 큰 정치를 생각하는 사람. 그러한 강단과 올곧은 생각이 대통령후보를 만든 가장 큰 힘이었을 게다.

 

 

 

 

난 그 날, 정치인 노무현의 참모습의 일면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동안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무시해왔던 내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짧은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한 없이 미안해졌다. 이후 노무현 후보는 알면 알수록 깊고 큰 우물이었다.

 

 

 

 

그날 이후 노무현 캠프에서 정책을 만드는 일에 깊숙이 개입했다. 후보가 나를 찾는 일이 부쩍 많아졌기 때문이다. 후보는 정리된 나의 생각들을 좋아했다. 정책 수립에 있어서 장기적 안목과 균형감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내 생각을 마음에 들어 했다. 캠프에서 정책이 만들어지면 감수하거나 정책의 올바른 틀을 잡는 것이 나의 임무가 되었다. 나는 경제정책의 새로운 방향성에 대해 그 때 그 때 후보에게 조언하고 공약을 만드는데 참여했다.

 

 

 

 

그리고 운명의 12월 19일이 다가왔다. 정몽준의 단일화 파기 선언이 있었지만 결국 노무현 후보는 제 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난 진심으로 기뻤다. 평생을 비주류로 살아 온 간난신고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는 기적을 이루었다. 아! 누가 한국사회를 폐쇄적이라고 했던가. 역사가 이렇게 뜨겁게 숨을 쉬고 있는데........

 

 

 

 

2010.09.06 11:05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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