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10월혁명

러시아 역사 (10월혁명, 1917년 11월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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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욱(kkkworm)등록 2010.11.04 09:35

10월 혁명과 러시아

 

 1917년 10월 25일 레닌은 세계최초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였음을 선언하였다. 10월 26일 혁명에 참여하였던 노동자와 병사들은 귀족여학교로 쓰였던 스몰리학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 건물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연단에는 볼셰비키 상임간부회의 위원들이 앉아있었고 대회장에는 혁명의 성공을 환호하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병사, 군중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레닌이 등장했다. "볼셰비키가 그 필요성에 대해 항상 얘기해 왔던 노동자, 농민 혁명이 드디어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0월 24일과 25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이름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레닌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 속에서 갑자기 인터내셔널가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명의 노랫소리가 부드럽게 고조되어 어느새 전체 합창으로 변했다. 레닌을 비롯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혁명가들과 군중들의 눈망울에는 감동의 눈물이 맺혔다.

 

 흔히 우리는 러시아혁명을 붉은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지로 러시아는 20세기 초 3번의 혁명을 경험했다. 첫째가 러일전쟁와중에 일어났던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란, 아버지 차르(러시아 황제)에게 빵과 온정을 기대했던 시민들을 차르의 군대가 겨울궁전 앞에서 무참히 살해했던 사건으로 가부장적 지배체제(차리즘)가 무너진 계기가 되었다. 제정 러시아를 받치고 있던 차리즘과 정부와 군대라는 두 기둥 중에서 이데올로기인 차리즘이 무너진 것이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1789)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왕권신수설이 새로운 사상인 계몽주의에 의해서 무너졌던 것이다. 역사는 피의 일요일 사건을 러시아 제 1차 혁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7년에는 또 다른 혁명이 있었다. 바로 2월 혁명이다. 당시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는 모든 것이 위기상황이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 군이 패전을 거듭하여 독일군이 깊숙이 쳐들어와 있었고, 농촌에서는 수확을 할 일손이 없었으며, 공장에서는 전선으로 간 남편들을 대신하여 여성들이 공장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남겨진 여성들이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있었고(하이퍼인플레이션) 아이들은 굶주림에 하나, 둘씩 죽어가고 있었다. 2월 23일 세계여성의 날(현 3월 8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여성노동자들에 의해 시위가 시작되었다. 빵을 요구한 여성노동자들에 의한 시위는 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수도가 마비될 위기에 놓이자 로마노프 왕조는 수비대에 대해 시민들에 대한 발포를 명령했다. 2월 26일 수비대에 대한 발포가 시작되었다. 혁명 기간 동안 희생된 시민들의 수는 무려 1,500명에 달했다. 시민들에 대한 발포가 시작되자 병사들은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자신들의 이웃이자 형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병사들도 시민들처럼 같이 굶주리고 있었다. 볼린스키 연대의 병사들이 더 이상의 발포를 거부했다. 27일 볼린스키 연대 병사들이 시민들에게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뒤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수비대 전체가 시민들과 합류하였고 혁명은 절정에 달했다. 3월 2일,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가 퇴위하면서 러시아 2월 혁명이 성공하였다.  

 

 갑작스러운 혁명으로 전제왕조인 로마노프 왕조가 사라지고 노동자, 군인으로 대표되는 소비에트가 조직되었다. 노동자와 군인의 대표들로 구성된 소비에트는 여러 가지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평의회와 같은 대표자 회의기능과 주요문제를 다루는 내각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코뮌과 같은 성격(사회주의적인)의 노동자, 군인의 자치 기구였다. 이러한 소비에트의 등장은 러시아 혁명가들과 지식인들은 매우 당황했다. 분명 2월 혁명은 자본주의혁명(부르주아적 혁명)인데 정권은 노동자와 군인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론'에도 부합되지 않는 봉건체제에서 바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정권을 의회(두마)에 주도록 결정하였다. 바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자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소비에트에 수용되어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레닌은 4월 귀국과 동시에 임시정부의 타도를 외치며 '4월 테제'를 발표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표어는 바로 즉각적인 사회주의로의 체제이행을 선언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소비에트를 볼셰비키 당의 산하에 둘 필요성이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는 군인,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농민을 포함하여 노농동맹을 시도했다. 군인 소비에트에는 평화를, 노동자 소비에트에는 빵을, 농민 소비에트에는 토지를 줄 것을 공약하였다.

 레닌의 4월 테제는 당시 러시아의 주요구성원들의 바램을 모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참전을 지지하였으며, 공장은 자본가들에게, 토지는 지주에게 주어진 상태였다. 자연스레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에게서 레닌의 볼셰비키 공산당으로 이동해갔다.

 

 10월 레닌은 소비에트의 지지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전복을 계획했다. 1917년 10월 24일 볼셰비키는 병력을 동원했다. 네바 강에 정박 중이던 순양함 오로라호의 발포는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순식간에 정부 중요기관을 점령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겨울궁전을 포위하였다. 10월 25일 겨울궁전을 점령하며 레닌은 혁명의 성공을 알렸다.

아이러니하게도 10월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부르지만 내용적으로는 쿠데타였다.

 이론적 측면에서 혁명과 쿠데타의 차이점을 보면

첫째 혁명은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지만, 쿠데타는 수도일원에서 일어난다.

둘째 혁명은 엘리트 층 전체를 바꾸지만, 쿠데타는 일부 엘리트가 다른 다수의 엘리트를 제압하는 과정이다.

셋째 혁명은 무계획적으로 일어나지만, 쿠데타는 치밀한 계획 하에 일어난다.

 

 10월 혁명은 많은 점에서 쿠데타와 일치한다. 첫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주변 일부지역에서만 일어났으며, 둘째 볼셰비키 일파가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 등을 정권에서 몰아냈다. 셋째 볼셰비키는 치밀한 계획아래 정부기관을 점령했으며 마지막으로 겨울궁전에 있는 임시정부를 무력으로 실각시켰다.

 

10월 혁명은 이러한 쿠데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멘셰비키와 우파, 왕당파, 외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른 정파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로 인하여 발생한 내전으로 인하여 무려 750만 명이나 되는 민중들이 내전으로 희생되거나 굶어죽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근거로 스탈린주의를 잉태하였으며 1930년대 약 2,500만 명의 소련인 들이 스탈린 공업화를 위해 학살, 숙청, 동원되었다.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10월 혁명의 성공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착취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오리라 여겼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해지리라는 혁명의 이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20세기 전체를 지배하였다.

덧붙이는 글 | 한토마에 게제한 내용입니다.

2010.11.04 09:25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한토마에 게제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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