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대왕 세종, 불통의 교주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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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민(attoexa)등록 2011.02.17 11:37
 세종은 대왕의 호칭이 붙는 명실상부한 성군이다. 후대의 조선왕들은 한결같이 세종을 흠모하여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조의 왕뿐만 아니라 이 나라 위정자라면 누구나 세종과 같은 위명을 역사에 남기고 싶을 것이다. MB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 욕망이 지나쳐 지금 천추에 후회할 4대강 죽이기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정도이다. 소통하는 세종과 대비하여 불통하는 MB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리더인가를 적시하려고 한다.

세종의 즉위 첫마디는 '의논하자'였다. 세종은 모든 국사를 신료들과 의논해서 결정했다. 세종은 의심스럽고 어려운 일이면 원로대신과 식견있는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 결정했다. 세종은 주로 경연(經筵)을 통해 의견을 수렴했다. 총 1,898회, 월평균 5번의 경연(=세미나)을 열고 재상, 언관,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국정을 논했다.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으로 불리운 허조(許租)가 주로 좌장 역할을 했다. 허조는 어떤 정책이 초래할 수 있는 문제점과 최악의 경우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세종은 그런 허조에게 때로는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경청하고, 제기된 문제점이 해결된 뒤에 정책을 시행했다. 허조는 임종시에 "우리 임금은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셨다"며 세종에게 감사했다.

총명(聰明)의 총은 '귀 밝은 총'이다. 즉,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의견을 내세우기 이전에 남의 말과 의견을 잘 듣는 것이다. 군주로서의 세종의 일과는 온통 경청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노하지 않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식과 지혜의 우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세종은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독서를 했다. 당시 세종의 학식을 따를만한 신하가 없었다. 세종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세워도 관대하였고 만인지상의 절대군주였지만 독단하지 않고 의논하여 지혜를 모았다.

세종의 소통은 공법(貢法=收稅法)의 개정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기존의 공법은 중앙에서 파견한 조사관이 풍흉(豊凶)의 정도를 가름하여 세액을 매기는 답험손실법(踏?損?法)이었다. 이 제도는 흉작으로 인한 농민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1391년(공양왕 3년)부터 시행되었지만 법 자체가 불합리하여 오히려 농민의 부담만 가중시켰다. 관내의 모든 농지를 수령이 조사하게 되어 있으나 사실상 불가능하여 아전이 맡게 됨으로써 협잡이 자행되었다.

이에 세종은 국가에서 정한 일정액을 내는 정액제(定額制)로 바꾸려 했다. 세종이 구상한 수세법은 수년간의 수확량을 평균하여 평년의 수확량을 책정하고 이를 기초로 토지세를 정하는 정액세제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관리와 백성들은 이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황희, 맹사성 등의 재상들은 비옥한 토지는 대체로 부농이 소유하고 척박한 토지는 빈농의 소유인데, 중간수준에서 세금을 매기면 빈농들에게 불리하다며 반대했다. 찬성논자들은 답험법으로 아전의 농간이 심각하고, 뇌물을 받은 조사관들이 세액을 낮게 책정하여 국가재정이 고갈되므로 정액법(定額法)으로 바꿔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이러한 세제개편 과정에서 무려 17년(1427?1444)에 걸쳐 다각도로 신민의 뜻을 묻고 논의를 하며 문제점을 보완하여 반대자들도 동의한 상태에서 시행에 들어갔다. 먼저 세종은 1427년에 "공법(貢法)의 폐단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과거시험의 논제로 내걸어 젊은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1430년에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1개월에 걸친 여론조사 결과 전국적으로 찬성이 98,657인으로 반대 74,149인보다 많았다. 토지가 상대적으로 비옥한 전라·경상도는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고(찬 65,864, 반 664), 함길·평안·황해·강원도에서는 반대가 압도적이었다(찬 1,410, 반 35,912).

찬성이 많았지만 세종은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시행할 수 없다"며 시행을 유보하고 오랜 논의를 거쳐 1438년에 찬성이 많은 전라·경상도만 먼저 시행하면서 문제점을 보완해 나갔다. 여러 해의 평균을 취해 일정한 세액[?一定額貢法]을 매기려던 원안(原案)에서 지역과 작황을 감안한 세제[差等定額貢法]로 보완하여 1444년에 전국적으로 연도별 풍흉작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전분연분법(田分年分法)을 채택하기까지 17년이 걸렸다.

세종은 즉위교서에서 "인을 베풀어 정치를 펴겠다(施仁發政)"고 천명했다. 세종은 특히 병자, 고아, 노비, 심지어 죄수 등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했다. 남녀유별로 치료받지 못하는 처자들을 위해 여의사를 선발해서 교육시켰고, 노비들에게 100일의 출산휴가와 함께 남편 노비에게도 30일의 산후휴가를 주었다. 이러한 세종의 어진 정치에 "조선에서 살고 싶다"며 대마도, 여진, 명나라와 남만인들까지 무리지어 귀화해 왔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뼛속까지 파고든 운하병 환자가 권력을 휘둘러 금수강산을 난도질하고 있다. 운하를 업적으로 삼아 이름을 남겨보려는 천박한 욕망이 넘쳐 운하공사를 치수사업으로 위장하여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위법·탈법·편법·기만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을 속여가며 시대착오적인 운하사업을 밀어붙이는 이 나라 권력자의 야비한 행태를 경멸하면서 분개한다. 누구의 말도 귀기울이지 않는 고집불통의 앙화가 나라의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오늘도 무력한 서생은 글로써 고발한다.  

임석민
한신대학교 경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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