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진학반 친구들이 부러워 해요."

인문계 고3 취업반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가는 청소년들

검토 완료

김태훈(kth1228)등록 2011.02.22 15:41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에 있는 '취업반'이라고 아시나요? 인문계 고등학교의 존재 이유랄 수 있는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한 학생들을 모아 운영되는 일종의 '특별반'입니다. 오랫동안 이들 취업반 학생들은 대학을 포기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루저(loser)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등록금이 하늘을 치솟고 대학 졸업 후에 취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 지속되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취업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도 높아졌고, 이들을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도 바뀌었습니다.

지난 주말 인문계고 취업반에 있으면서 1년간 모 간호학원에서 '직업 위탁교육'을 받아온 네 명의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간호학원을 1년간 수료하면 국가자격증인 간호조무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들은 올 3월 12일에 있을 간호조무사 자격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서울여고를 올해 졸업한 김혜림, 전은경, 김현희양과 명지고를 졸업한 박승연양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취업반에 가기 위해 가족을 설득하기도

첫번째 질문은 취업반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혹시 성적 때문에 떠밀리듯이 취업반을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기성세대라면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되돌아온 답은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취업반을 선택했다는 거였습니다. 혜림이의 경우는 부모님이 먼저 취업반 진학을 제안하셨다고 합니다.

"고2 때 부모님이 먼저 취업반에 대한 정보를 주셨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도움을 받았어요. 어릴 때부터 간호 일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충분히 생각하고 취업반을 선택했어요."

김혜림양 "자격증 취득 후 1년 재수해서 간호학과에 도전하겠다." ⓒ 김태훈


혜림이는 중학생 때 한 적성검사에서 간호사가 잘 어울린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네요. 그런 혜림이의 마음을 잘 아는 가족들이 먼저 나서서 취업반을 추천해준 격입니다. 현희의 경우도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공부 안 할 거면 취업반으로 가는 게 낮다고 추천해주셨어요.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동의해주셨고요. 저희 오빠가 대학엘 갔는데 가족 전체가 너무너무 고생을 했거든요. 등록금도 버겁고 취직문제도 막막하고요."

반면 승연이는 본인이 먼저 결정하고 가족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경우입니다.

"할아버지 말고는 할머니, 아빠엄마, 언니 등 가족 모두가 제가 취업반 가는 것을 반대하셨어요. 할아버지가 찬성하신 건 대학나와봐야 취업 안 되니 애초에 자격증 따는 게 낫다는 것이었어요. 전형적인 옛날 생각이죠. 하지만 그 생각이 요즘에는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나머지 가족들은 제가 준비를 잘 해서 설득을 하니까 이내 승락해주셨어요."

취업반을 부러워 하는 대학진학반

하지만 학교는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곳입니다. 특히 외부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문화 속에서 이 아이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취업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이들은 생각보다 취업반 생활에 자긍심이 높았습니다. 친구들보다 먼저 인생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앞서간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은경양 "의무부사관에 도전해 직업군인의 길을 걷고 싶다." ⓒ 김태훈


"사실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들 중에 대다수가 구체적인 인생의 계획이 없잖아요. 하지만 저희는 처음부터 계획을 갖고 시작하는 거니까 앞서간다고 생각해요(승연)."

취업반 아이들의 자긍심이 이 정도가 되다보니 오히려 진학반 아이들이 부러워 하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네요.

"저희들을 부러워 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공부만 하는 게 지루하다고, 실제 써먹을 수 있는 자격증이라도 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면서 고민을 하더라구요(은경)."

하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 친구들이 대학에 합격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혹시 뒤쳐지는 건 아닐까 하면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혜림)"네요.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3을 막 끝낸 아이들의 가장 큰 화두는 "누가 앞서 가느냐"인 것 같았습니다. 취업반에 자긍심을 가진 것도 '앞서 간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했고, 친구의 대학합격 소식에 순간 움츠러드는 것도 '혹시 뒤쳐지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으니까요. 조금만 더 살아 보면 이때 살짝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을 저절로 알게 될 테지만, 인생의 가장 큰 기로에 선 아이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인 것 같았습니다.

박승연양 "가능하면 대학에 가서 전문역량을 키우고 싶다." ⓒ 김태훈


취업반에서 오히려 우등생이 된 사연

그런데 인터뷰를 통해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취업반의 경우 이 친구들처럼 전문 교육기관에서 위탁교육을 받게 되는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도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는 위탁교육기관에서 치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험이 고스란히 3학년 1학기 성적으로 내신에 반영되어 대학입시에도 활용이 된다고 하네요.

그런데 재미 있게도 제가 인터뷰한 이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내신 7~8등급으로 하위권에 있지만, 학원에서는 최고 점수를 받아 1,2 등급을 받았다는 겁니다. 당연히 전체 내신 등급도 올라가는 효과를 본 것입니다. 그 덕분에 은경이는 모 대학 수시 모집에 합격을 했고, 승연이는 최종 합격 여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반엘 갔는데, 그 선택이 오히려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 된 것입니다. 학교 공부와 학원 공부가 어떻게 달라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요?

"학원에서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잖아요. 과목별 성적이 어떻게 되는지 과거를 묻지도 않구요. 그리고 모두가 저와 똑 같이 출발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잘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학교선 못해봤지만 여기선 톱이 되고 싶었어요.(현희)"

실제로 이 아이들이 학원에서 1등부터 4등을 차지하고 있답니다. 인터뷰 내내 보여준 자신감이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공부하는 과정도 무척 재미 있었어요. 수학처럼 배워도 어디에 써먹는지 모르는 지식이 아니라 배우는 족족 현실에 적용되는 것들이잖아요. 특히 각종 질환에 관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알아두면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고요. 그 덕분에 가족이나 친구가 어디 아프면 저한테 먼저 물어봐요(혜림)."

김현희양 "자격증 취득후 곧장 취직해 효도부터 하겠다." ⓒ 김태훈


"병원 실습 갔을 때도 모든 게 재미 있었어요. 침상에 'TA'가고 적혀 있으면, '아! 저거 교통사고야'하고 즐거워 했죠. 배운 걸 바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승연)."

어떻게 보면 이 아이들은 취업반을 통해 지식과 배움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학교에서의 지식과 배움이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배움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취업반으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아이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취업반이란 '대학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앞서도 잠깐 언급해드렸듯이 아이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기회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취업반 공부에 재미를 붙이니 3학년 1학기 성적이 쑥~ 올라갔고, 그 덕분에 내신등급이 좋아져서 오히려 대학진학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은경이는 이미 합격증을 받아놨고, 승연이는 모대학 간호학과의 대기번호에까지 올랐다가 아깝게 탈락했지만 다른 과에서는 합격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혜림이와 현희도 저마다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한 명씩 들어볼까요?

"최근에 가족들과 상의를 했는데, 이번에 자격증을 따고 나서 재수를 할 생각이에요. 정식으로 간호학과에 들어가려고요. 실습하면서 느낀 건데, 간호조무사로는 환자를 돌보는 데 한계가 많더라고요. 주사를 놓든 투약을 하든 실제 의료행위를 하려면 간호사가 돼야 하겠더라고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우대하는 곳도 여럿 있거든요. 예전에 학교공부를 등한시한 게 좀 후회가 되기는 합니다만, 이제 목표가 분명히 생겼으니 1년간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혜림)."

"간호학과는 아깝게 떨어졌지만 보건행정과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요. 가능하면 대학에 가서 좀 더 저의 전문성을 높이고 싶어요(승연)."

"제 꿈은 군인이 되는 거예요. 의무부사관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거기에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일단 대학에 가서 의무부사관이 되는 데 필요한 공부와 자격증을 더 딸 생각이에요(은경)."

"저는 자격증 따는 대로 바로 취업할 거에요. 결혼 자금도 빨리 모으고, 부모님 효도도 빨리 해드리고 싶어요(현희)."

다양한 재능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취업반 아이들과의 인터뷰가 처음 잡혔을 때 저는 살짝 걱정이 됐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우였습니다. 아이들은 취업반을 통해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공부해야 할 이유, 배워야 할 이유가 생기자 아이들의 자긍심은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요즘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다고들 하지요? 여러가지 대책과 처방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든 아이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날 만난 네 친구들처럼 다양한 학생들이 다양한 기회를 통해 스스로 기회를 키워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육 당국에서도 오늘 소개해드린 취업반의 이런 사례들을 잘 연구한다면, 훨씬 좋은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취업반으로 간호학원에서 위탁교육을 받고 있는 친구들 이들 네 친구는 오는 3월 12일에 있을 '간호조무사 자격시험'을 한창 준비하고 있다. ⓒ 김태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http://timshel.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http://timshel.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