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지진 그리고 인간

생명을 뒤덮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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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junerpark)등록 2011.03.28 10:11

    3월 24일. 꽃샘추위라기에는 너무 찬 바람이 불었던 지난 며칠을 뒤로 하고 따뜻한 듯 했던 아침이다. '이제 드디어 봄이 오는 구나'. 계속된 겨울의 연장선 상에서 봄 기운은 정말 '봄의 느낌'이다. 평소 같으면 황사 때문에 피할 법한 산책도 봉의 느낌은 황사도 이겨낸다. 햇볕이 내리쬐면 더 좋으련만 그래도 봄은 충분히 아름다운 듯 하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다. 교실 안에서 공부를 하는데 한 두명씩 '어', '아' 소리를 낸다. 고개를 돌리면서 나도 연달아 고개를 갸우뚱하는 병아리처럼 그 말을 이어간다. '어'. 눈이다. 눈이 온다. 내가 기다리는 봄이 끝나 간다. 굵은 눈송이가 쏟아져 버린다. 시기가 중요하다는 옛말이 옳은가. 겨울에 보면 아름답기만 한 저 눈이 지금은 야속하기만 하다. '거짓말'. 그러고 보니 옛말도 거짓말을 한다. 우수(雨水)가 지났는데 왠 눈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저 눈이 전혀 포근하지 않다.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마치 깔려 버릴 것만 같다.

 

    친구들은 저 눈에 방사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뼈있는 농담을 주고 받는다. 일본의 지진 피해로 인한 방사성 물질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들이다. 3월 말에 내리는 눈은 즐거움보다도 불안이 먼저이다. 방사성 물질만큼이나 불안하다. 아니, 그보다도 더 불안하다. 몇일 전에 수업시간에 배운 시가 하나 떠오른다. 김춘수 시인의 '샤걀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다. 김춘수 시인은 3월에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서 어떤 봄의 생명력을 느꼈다는 것일까. 3월에 내리는 눈에 생명력과 활기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내가 보고 있는 3월의 눈은 마치 오발탄과 같은 불안과 후회뿐인데 말이다.

 

  3월 초, 우리 학교 학생들이 산소를 산다. 정확히 말하면 사는 것이 아니라 산소를 나누어 받는다. 새로 출시되는 산소캔을 시범적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반응을 보려는 것이다. 약 1분 분량의 산소캔의 가격은 9800원. 경제 선생님께서 언젠가는 산소도 자유재가 이닌 경제제가 되어 사서 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뇌리에 스친다. 우리가 산소를 사서 쓰는 첫 세대라는 의기양양한 대화 속에 섞인 웃음은 자조이다. 그리고 그날도 어김없이 눈은 위에서 아래로 우리를 흘겨보며 떨어진다.

 

 

 

    2008년 중국 사천 대지진. 2009년 인도네시아 지진. 2010년 아이티 칠레 지진. 그리고 2011년 일본 도호쿠 대지진. 나열하자면 이보다도 훨씬 많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도 우리를 안타깝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니, 우리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본 도호쿠 대지진. 이것 만으로도 충분할 지 모른다. 지구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땅, 물, 불. 그리고 사람. 이들이 이 세계의 전부라고 외치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금 우리의 상황을 세계의 멸망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地災. 실은 지재라는 말은 없다. 하지만 땅의 재앙은 있다. 3월 11일 일본의 동북부를 뒤흔든 대지진의 현장은 정말 아비규환이었다. 처음 그 뉴스를 접했을 때는 그 심각성을 몰랐다. 나는 규모 9.0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아무리 책에서 읽어 보았고 TV로 접해보았지만 나에게는 그저 힘든 상황일 뿐이다. 그리고 그냥 일본에 큰 지진이 났고 그 여진들이 6.0을 넘고 이번에는 그 전 잦은 지진들보다 좀 더 심각한 것이겠거니 했다. 게다가 2008년 1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중국 쓰촨성 대지진 당시 중국에 있었던 나로써는 처음 나오는 일본 대지진의 사상자 집계 결과가 우습게 보였다. 철이 없는 것일까. 첫 보도에서 나온 300여명의 사상자라는 소식에 '어, 생각보다 적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일보에 대한 악감정이 섞여있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순간 나온 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지구의 복수가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水災. 12일, 지진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쓰나미가 몰려왔다. 동영상으로 본 쓰나미는 화면 속에서 나를 덮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쓰나미는 자신이 휩쓸고 간 센다이시에 승전비라도 되는 듯 시신 4천여구를 남겨두고 갔다. 소름이 끼친다. 단 한 순간이라도 피해자가 적다며 얼마 안되는 피해 가지고 호들갑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들이 닥치는 쓰나미 소식은 바다 건너 나에게도 공포의 순간 소식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쓰나미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들도 쓰나미처럼 우리들의 머릿속을 덮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에게 돌아온 대답. '일본이 우리나라의 방파제 역할, 걱정하지 않아도 되'. 일본이 아무리 지진 피해에 정신을 빼앗겨 이런 발언 하나하나에 대응해 줄 수는 없다지만 우리의 발언의 방파제는 어디에 있을까. 한번 흘린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흘리지 않을 수 있는 물은 흘리면 안 된다. 잘못 흘린 물이 우리의 쓰나미가 되는 것이다.

 

    火災. 하루가 지난 13일, 규슈 화산이 폭발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차례가 온 것일까. 땅이 갈라지고 물이 올라오고 이제는 불이 터져 나온다. 이제는 도망갈 곳조차 없다.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사람들. 이제 도망갈 곳이라고는 하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라는 발 아래가 두려워 하늘로 피했나 보다. 아직 사태가 다 수습되지 않았지만 벌써 4만명이 이곳이 무서워 하늘로 올라갔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마 평온한 나날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그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리 이곳이 무서워도 하늘로만은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 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늘이 무너지는데 하늘로 향하면 안 된다. 반드시 그곳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人災. 원자력 발전소는 한때는 꿈의 에너지 산업이었다. 하지만 이제 일본인들에게는 꿈에 나올까 무서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자연재해들이 잇따라 겹친 후 마지막 결정타는 바로 인재였다. 일본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수많은 국가들도 하나 둘씩 일본을 떠나고 있다. 방사능 물질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숨을 쉬자니 공기에 방사성 물질이 떠다닌다니 숨을 쉬어도 숨이 막히는 듯하고, 물을 마시자니 수돗물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 되었다니 마셔도 목이 차오를 것이다. 일본이 지진 피해를 입고 난후 모두가 한마음으로 일본을 도왔다. 한국 과거 정신대 할머니들조차도 그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훈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원전 폭발과 방사능 유출이라는 인재가 그들의 뜨거운 마음마저 일본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였다. 1903년 퀴리 부인이 노벨상을 받을 때, 그녀의 수상연설은 독특했다. '라듐이 나쁜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됩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방사성 물질을 무기로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 자연이 될지는.

 

 

 

      인과응보. 이번 사태는 인과응보이다. 일본인의 잘못으로 일본이 천벌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천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이것이 자연의 섭리를 역행한 것에 대한 자연의 엄벌일까. 과연 우리는 자연의 순리에 역행할 수는 있는 것일까. 우리가 지구에 못할 짓을 해서 지구가 우리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우리의 잘못을 빨리 알고 지구도 이제 그만 우리에게 노여움을 풀었으면 좋겠다.

 

2011.03.28 10:09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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