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같이 살아 온 36년 살아 갈 20년

검토 완료

김순자(sjkim9988)등록 2011.05.20 14:00

홍천강 산책 호야와 해리가 앞서고 강아지들이 종종걸음으로 뒤따른다. ⓒ 김순자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생각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옛 선인의 가르침대로 소박한 일상이다.

홍천군 한옥학교

강원도 홍천군 서면 반곡리에 민박집 방 한 칸을 빌려 살림을 차렸다. 한옥학교에 다니는 남편의 건강을 직접 챙기기 위해서이다. 그가 한옥학교를 입학하고 처음 두 달은 나는 계룡산 자락의 집에 남았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병든 몸으로 스스로 집을 짓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했던 대로 혼자 지낸 두 달여 동안 그의 건강은 더 나빠졌다. 하루 여덟 시간의 교과과정과 실습시간도 그의 건강으로는 무리인데다, 저녁에는 설계프로그램 공부와 글쓰기 까지 자청하여 하루에 3~4시간 수면으로 버텼던 모양이다. 혈당조절이 안되고 몸이 부어있는 그의 건강상태는 병색이 완연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제동장치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달리기만 할 것인가-.
남들은 그를 보고 삶의 열정이 대단하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의지가 부럽다, 자신의 롤 모델이다. 당신을 통해 대리만족을 한다고 응원을 보내지만 아내인 나는 그의 지나친 무모함이 절벽을 향해 질주하는 랩랜드 쥐처럼 아슬아슬 해서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간다.

그를 혼자 둘 수 없어 내가 강원도로 올라오기로 했다. 개가 한 마리만 있어도 방을 주지 않았는데 호야와 헤리 그리고 호야가 낳은 새끼 세 마리 까지 데리고는 도저히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린애 많은 집에서 셋방 얻을 때 아이들 수를 속이듯이 개가 한 마리라고 속였다.

사실 호야는 우리 개가 아니고 남편 친구의 개를 분만할 때 까지만 맡기로 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친구가 호야를 데려갈 처지가 못 되어 다섯 마리의 개를 이끌고 온 것이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사정을 말하고 새끼 한 마리를 주기로 하고 해결되었다.

남편을 따라 강원도 홍천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올 때 주변에서는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즐길 것도 없는 낯선 시골에서 적적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믿는 바가 있었다. 이 적적함이 내 마음을 맑고 투명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보다 홀로 있을 때 훨씬 자유롭고 충만하다는 것을-.

홍천강따라 흐르는 생활

새벽 5시, 그가 백팔 배를 하는 동안, 좌선을 하고 고구마와 땅콩 몇 개, 사과 한 알로 아침식사를 한다. 7시에는 남편과 호야와 해리, 호야가 낳은 강아지 세 마리와 함께 강변길 산책을 나간다. 호야와 해리는 강변의 갈대밭을 야생마처럼 뛰어 다니고 강아지 세 마리는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우리 뒤를 따른다.

뱃속 깊숙이 스며드는 새벽 찬 공기, 물안개 자욱한 강물, 떠오르는 아침 햇살, 갈대숲을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만물이 우주의 질서대로 활동하며 조화를 이루는 아침 산책은 축복의 시간이다.

9시에 그가 한옥학교에 가고나면 자잘한 집안일을 끝내고 창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명상을 한다. 마음의 흐름을 관찰하며 호흡에 집중한다. 어린 시절은 월출산이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시골집에서 자랐고 지금은 계룡산 자락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으며 은퇴 후를 위하여 지리산 기슭에 오두막까지 마련하면서 산골 생활에는 익숙하지만 바다나 강과 함께하는 강촌 생활은 처음이다.

강물이 흐른다. 우주 속의 모든 존재는 쉼 없이 흐른다.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강물을 바라보니 모든 존재는 끝없는 흐름을 이어간다. 변화는 타의적인 반면 흐름은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며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명상이 끝나면 한 시간 가량 요가를 하고 점심 식사를 한다. 가끔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와 자장면이나 막국수를 먹으러 가기도 하고 점 백 원짜리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오후에는 그동안 써놓은 글을 저장하거나 요즘 나의 일상을 소재로 수필을 쓴다.

외부와 차단되고 강물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서일까-.

마음은 자유롭고 사념이 사라지고 평온하다. 요즈음처럼 평범한 일상과 매일의 자연현상에서 만족과 영감을 이끌어 내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

오후 4시가 되면 어김없이 해리가 짖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참은 오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의사표현이다. 진도개 호야와 달리 래브라도 리트리버인 해리는 감정표현을 잘한다. 무엇을 요구할 때와 기쁨을 나타내는 소리가 다르고 기분이 좋을 때는 극단적인 동작으로 사랑표현을 한다. 다시 다섯 마리의 개를 이끌고 산책을 다녀와서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6시에 그가 돌아오면 현미밥에 두세 가지의 나물과 김치로 저녁 식사를 마친다. 밤 8시에는 마을길과 논둑길로 산책을 나가고 9시에 들어와 차 마시고 샤워하고 10시가 되면 그는 컴퓨터 앞에, 나는 TV앞에 앉아 각자 좋아하는 것을 즐기다가 잠자리에 든다. 있는 그대로 보낸 하루는 천국에서의 하루와 같다는 중국 속담처럼 보낸 하루가 저문다.

36년 전, 갓난아기를 데리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전방으로 배치된 남편을 따라 강원도 철원군 내면 신수리에 조그만 책상과 비키니 옷장, 석유풍로와 양은 냄비 몇 개가 전부인 신접살림을 차렸다.

36년이 지난 지금, 개 다섯 마리를 데리고 한옥학교에 입학한 남편을 따라 강원도 홍천군 서면 반곡리에 컴퓨터와 책 몇 권, 간단한 부엌살림이 전부인 단칸방에서 오래된 부부의 새로운 신접살림(?)이 시작되었다.

딸아이를 업고 육군 중위 군복을 입은 퇴근길의 젊고 풋풋한 그를 마중 나갔듯 다섯 마리의 개를 이끌고 목수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치목장에서 퇴근하는 그를 마중 나간다. 그는 내년에 회갑을 맞는다. 신수리에서 반곡리까지 36년이 흘렀건만 처음부터 그래왔듯이 그가 가는 길에 그림자가 되어 좁은 길을 간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