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 '섬진강'을 죽이고 싶지 않다

시인 김용택의 절망스런 '희망칼럼'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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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형(besanson)등록 2011.05.21 16:45
아니다.
나는 전교조를 비판, 비난, 심지어 비아냥대는 김용택 시인에 맞서 전교조를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시'를 옹호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그러나 이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질문의 도상에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를 모른다. '단지 모를 뿐'이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시를 사랑하기에--(아, 나는 사랑이 무언지도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사랑의 이름으로 시를 한번 옹호해 보려는 것이다. 아니 한편으로 나는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나는 '전교조'가 아니라 '전교조의 많은 교사들'을 옹호하고자 한다고. 시인 황지우의 말 ("나는 시를 쓸 때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 한다")에 빗대건대, 나는 정형화되고 추상화되고 필경 화석화한 '시'로서의 '전교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살아 숨쉬는 '시적인 것'인 것으로서의 '전교조(교사들)'을 옹호해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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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당신들의 동지'

며칠 전 학교 교무실에서 전교조 신문 <교육희망>(2011. 5.9.)의 한 칼럼의 이 같은 제목을 필자의 이름(김용택 시인)과 함께 발견한 순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소리? 이건 '당신들의 한심한 동지'를 잘못 교열한 것 아닐까? 

한심한 전교조의 한심한 '오랜 동지'였던 교사 김용택?
'전교조란 말에 반감' 있는 시인 김용택?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라면 누군지 모르지만 '당신들'이 한심하다는 말이고, '당신들의 한심한 동지'라면 '내'가 한심하다는 말이니까, 시인이라면 응당 (때론 한심하기도 할) 자신에 대한 성찰과 고백부터 먼저 할 것이라는 생각부터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그게 아니었다. '한심한 당신들'은 전교조 (선생들)이었고 그는 글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었다.

'한심하게도 나는 평생 당신들의 동지였다.'

과거형인 것을 보면 이제는 동지가 아니라는 말이었는데, 어쨌든 그러고 보면 결국 그는 자신의 한심함을 성찰하고 고백한 셈인 것 같기도 했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내 관심은 딴 데 있었다. '평생 전교조 회비를 내고 살았'다는 시인은 글의 첫대목에서 '나는 전교조란 말에 반감이 있다'고 직설하고 있었으니 나는 왜? 무엇 때문에? 급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대체로 이랬다. 

① 전교조는 '강연 청탁 전화할 때 지나치게 뻣뻣하고 경직되어 있고 불친절'하며 '강연료를 일방적으로 정한다.'
② 이에 대해 '나의 의견을 말하면 시인이 돈을 따진다고 몰아 부친다.'
③ '자기들 말 안 들으면 이제 한물 간 시대착오적인 가치의 잣대를 들이댄다.'
④ 전교조 사무실이 '창고'처럼 지저분하고 그 '얼굴들'이 '하나같이' '무심하고 경직'된 '직원'들은 선생님들의 조합비로 산 물자를 아낄 줄을 모른다.
⑤ 전교조 교사들도 어느 틈에 '떡하니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이거나 '어떻게 하든지 한자리 차고앉으려' 하고, '진보적인 교육감이 당선되자 그 권력의 주위를 어슬렁' 거린다.

전교조의 시대착오적인 위선과 오만이
김용택의 '경악'과 '곤혹'과 '환멸'의 까닭?

여기에 덧붙여 그가 차마 못 봐 준 건 또 있었다. 그건 전교조의 자만과 오만이다. 그가 보기에 전교조는 '놀랍게도' 자신이 '아직도 우리 사회 속에서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심정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줄' 알고, '무슨 특별한 존경을 받고 사는 선택된 조직인 줄' 알며, '그들이 부르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하는 줄' 아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시인이 '경악'도 하고 '곤혹'스럽기도 하고 '심한 배신감과 인간적인 환멸'을 느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무엇보다 그는 전교조의 오랜 '동지'였다는 것이고, 1989년 전교조 결성 당시 1500여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 날 때 자신의 '동지'이자 가까운 친구이며 또한 시인이었던 교사 도종환이나 안도현과는 달리 자신이 '해직' 대열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은 '무서워서'였다며 그땐 정말 괴로웠고 그게 평생의 부채가 되었노라는 인간적인 고백(빛바랜, 다소 생뚱맞은)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도종환․안도현처럼 해직 교사 못 된 것은
'무서워서였다'는 빛바랜 고백은 왜?

아무튼 인간 김용택은 고백이든 뭐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MB정권으로부터 그악하게 핍박당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며 시인 안도현이 옹호했던 전교조 (교사들)을 시인 김용택은 비판할 수 있다. 비난과 비아냥거림의 매를 들 수도 있다. 그의 질책과는 상관없이 나도 전교조 20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회한을 감당할 수 없곤 하니까. 이른바 '노선 투쟁' 의 과정에 일부 활동가들이 어제의 '동지'들을 오늘의 '적'보다도 더 미워하고 타기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전교조를 떠나고 싶기조차 하니까. 

2
전교조에 대한 시인의 '반감'이 자신의 직접 경험에서 나온 한에 있어서 그것에 기초한 비판, 비난, 비아냥거림은 그의 권리고 자유이니 우리는 그것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내가 보고 느끼기에 그렇더라'고 하는 데야 뭐라고 하겠는가? 이를테면 그는 '떡하니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인 전교조 교사를 본 것이고 '어떻게 하든지 한자리 차고앉으려' 하거나 '진보적인 교육감이 당선되자 그 권력의 주위를 어슬렁' 거리는 전교조 교사를 목격했다는 것인데 시인이 안 본 걸 고발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대고 '전국에 전교조 출신 교장이 몇 명이나 되는지 당신은 알고나 있으신지? 얼마 전 겨우 두 명의 전교조 출신 교사가 내부 공모형 교장으로 합법적으로 선출되자 교육과학기술부가 나서 길길이 반대를 함으로써 한 분만 교장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으신지? 교장이 되자 거들먹거리는 전교조 출신 교사, 진보 교육감이라는 권력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전교조 교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셨는지?'라고 추궁성 질문을 들이댄들, 사적(私的) 경험 제일주의자인 듯 보이는 시인이 움쩍할 리도 없겠으니 차라리 말 않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한 것이다.

권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전교조 교사?
아직도 존경받고 사랑받는 줄 착각하는 전교조?
김용택은 딴나라 교사, 딴나라 사람인가…

그건 그렇고 전교조의 오만에 대한 시인의 질타를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내겐 매우 오만해 보이는 사람도 어떤 사람에겐 전혀 오만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김용택에겐 전혀 오만해 보이지 않은 사람도 내겐 오만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용택이 전교조가 오만하다고 느꼈다면 전교조는 오만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할지라도 전교조가 오만하게 비칠 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교조가 아직도 우리 사회 속에서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심정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줄' 알고, '무슨 특별한 존경을 받고 사는 선택된 조직인 줄' 알며, '그들이 부르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하는 줄' 아는 집단이라니? 이 대목에서 나는 참말이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도대체 김용택은 '딴나라' 사람, '딴나라' 교사였나……? 아니면 '섬진강 무릉도원국'의 백성일 뿐이었나? MB 정권 치하, 부끄럽게도 전교조 교사는 학생과 학부모 앞에서 자신이 전교조임을 '커밍아웃'해야 할 것 같은 답답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 언제부턴가 화가 날 정도로 '고개 숙인 전교조'가 되어버린 현실을 그는 도무지 모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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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김용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듭 자문하는 동안 나는 시인의 말 한 마디가 유독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전교조는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의) 강연료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하면 시인이 돈을 따진다고 몰아 부친다.'

시인이 돈 너무 밝힌다는 소문은
그저 떠도는 소문일 뿐이라 여겨보지만

시인이자 교사인 김용택이 전교조 지부나 지회, 전교조 교사가 있는 학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랜 세월 많은 강연을 다닌 것을 나도 알고 있다. 한때는 섬진강변의 시인 집까지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가슴에 아름다운 추억을 담아온 선생님들도 적지 않았다. (나도 해직 시절 그의 섬진강변 집에 가본 적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시인이 돈(강연료) 문제로 선생님들과 트러블이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전해져왔다. 시인이 아무래도 돈을 너무 밝히는 것 같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빠듯한 학교 공식 예산(20~30만원)에 더해 교사들(이 선생님들은 오직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시인을 만나게 하고 싶은 열망에서 어렵사리 행사를 기획했던 것인데)이 십시일반으로 50만원을 맞춰 드렸는데도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더라든지, 그가 그렇게 강연료에 민감한 것은 기업체에서 백 만 단위의 돈을 받는데 길들여져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라든지 하는 말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을 귓가로 흘려듣고자 했다. 소문은 소문일 뿐 진실은 다른 곳에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을 생각했고, 그리고 시인을 향한 사랑과 존경에 더해 강연료도 가능한 한 듬뿍(시인이니까 오히려!) 드리는 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시인 김용택에게 생 마음으로 묻고 싶다.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시인 김용택이 받아 마땅하다는 강연료 수준과
아이들을 향한 '무주상보시' 마음 사이의 멀고 먼 거리

"돈에 울고 웃는 장사꾼이 아닌 시인에게 돈 너무 따지는 거 아니냐고 따지는 게 무어 그리 나쁜지요? 그런 말에 왜 그렇게 마음이 불편했던가요? 그 전교조 교사가 얼마나 무례했는지는 모르지만 애초 당신은 돈과는 상관없다는 마음, 무주상보시(無住常布施)의 마음으로 강연장에 갈 수는 없었던 건가요? 왜냐하면 십중팔구 거기엔 전교조 선생들(당신이 불신하는)보다도 그들을 만난 덕분에 당신(의 시)를 사랑하게 된 아이들(당신이 그토록 사랑한다는)이, 학생들이 다수 앉아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믿는 돈(강연료)의 액수는 어떻게 산출한 것인가요? 당신의 유명세인가요? 당신 시의 아름다움의 가치인가요? 멀리 섬진강 시골에서 달려온 노고의 대가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기에, 먹고 살아야 하기에 요구되는 당신의 최소한의 생활비의 일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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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주상보시를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나부터 이러니 시인은 전교조(교사)의 오만을 말하는 거 아닌가? 그럴 것이다. 좋다. 고미숙 선생은 <돈의 달인>에서 돈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일부 운동단체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기도 했는데 전교조도 어떤 부분에선 그런 정직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나는 부정하지 못한다. 시인 김용택도 그런 지점을 지적하고자 했던 걸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그를 의심하게 되었음을, 슬프게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이슬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아니 나는 이슬이나 먹고 사는 듯싶은 시인과 시를 믿지 않는다.

삶과 시가 하나였던 젊은 날의 시인 김용택과
판관인듯 계몽성 교설 쏟아내는 퇴직교사 김용택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치자'던 젊은 날의 시인 김용택을 나는 기억한다. 삶과 시가 하나였던 시절의 그를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는 누구인가? '한심한 당신들'인 전교조를 질타하면서 그가 쏟아낸 계몽성 교설을 읽으며 기어이 내 가슴의 한 모서리는 무너져 내렸다.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찬 불편한 얼굴을 거두어 들여라. 반성하라, 마음의 문을 열어라. 부드럽고 착하고 선량하고 정답고 선하고 따사로운 사랑으로 빛나는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 (……) 이 너절한 세상 속에서 인간을 지키려는 큰 사랑의 교육이 있어야 하고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려는, 인간의 희망을 찾으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이 공허하게 소리 높여 외치는, 이 멀쩡하게 옳은(옳아 보이는) 시인의 말은 전혀 '시적(詩的)'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시와 산문도 구분 못 하는 무식쟁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시종 국외자인 듯(실제 그는 전교조의 '국외자'임을 분명히 했다 - 20년 역사의 전교조 신문 편집자의 원고청탁 전화를 받고서야 '이런 신문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고 했으니), 판관인 듯 말하는 그의 근엄한 태도야말로 시(詩)에 대한 모독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의 짧은 글을 되풀이해 읽으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호한, 휘갈겨 쓴 것이 분명한 이 악문을 정말 시인 김용택이 쓴 걸까,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시인'의 글이 아니었기에, 도무지 '시적'이지 않은, 시가 죽어버린 글이었기에. <한심한 당신들의 동지>라는 글을 <섬진강> 연작시와 나란히 두고 읽는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참담했다. 

서정주의 <동천>과 <처음으로>를 함께 읽는 참담함
김용택의 <섬진강>과 '희망칼럼'을 함께 읽는 참담함

아, 시인 서정주의 절창 <동천(冬天)>을 또한 서정주가 쓴 <처음으로 -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와 함께 읽어야 하는 그런 참담함이란! <동천>이, <국화 옆에서>가, <풀리는 한강 가에서>가 사무치도록 아름다운만큼 배가되는 그런 참담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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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용택의 절망스런 <희망칼럼>을 학교에서 읽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내 서가에서 그의 시집을 찾았다. <섬진강>, <맑은 날>과 같은 초기 시집 두 권과 내가 가진 것으로선 가장 최근 것인 <그 여자네 집>이 있었다. <그 여자네 집>을 아무렇게나 펼치니 마침 다음과 같은 시가 눈에 들어왔다.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내 야윔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세상의 길가' 전문--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 그의 시를 '사무사(思無邪)'한 마음으로 읽을 수 없게 된 까닭일까? 나는 이렇게 반문부터 하고 있었다. 2시간 남짓한 강연에 50만원의 강연료가 적다며 얼굴을 붉혔다는 시인의 '가난함'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물질의 가난함인가 마음의 가난함인가? 그리고 내 '가난함'으로 누군가가 배부르다니? 내 '야윔'으로 누군가가 살이 찐다니? 내가 추구하는 '가난함'이 진정 참된 것이라면 이웃의 누군가도 시인과 함께 가난해져야 하지 않은가? 시인 김용택은 오히려 이 미친 자본의 시대가 잃어버린 가난의 미덕을 노래해야 하지 않았을까?

4대강 살리기가 강을 죽이듯
시인의 칼럼 한 편이 내 마음 속 '섬진강'을……

어차피 그는 시인 송경동처럼 이 시대의 진짜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과 하나가 되고자 하고, 그 곁에 있고자 하고, 지독한 가난의 구조적 사슬에 항거해 '거리의 시'를 쓰는 그런 시인은 아닌 다음에야……! 그러기에 나는 시인의 '서러운 눈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무엇인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문득 알게는 되었다.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나는 것은 그의 애매한 눈물이 적셔준 덕분은 아닌 것 같다는 것,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우리의 강을 무참히 죽이고 있듯이 그의 짧은 칼럼 하나가 내 가슴 속에 오랜 세월 푸르게 흐르던 김용택의 '섬진강'을 오염시키고 급기야는 죽이고 말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6
나는 이쪽에 박노해가 있으면 다른 쪽엔 청록파도 있어야 한다고 믿는 시 옹호주의자다. 거리의 시인 송경동을 무기 삼아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을 공격하는 건 부당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송경동은 송경동의 자리가 있고 김용택은 김용택의 자리가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 자리가 진정 '시'의 자리인가 아닌가에 있을 뿐이다.  

최근 읽은 평론가 신형철의 시적인 너무나도 시적인 산문의 일단은 이랬다. "새해(2009년) 벽두에 가장 참혹하고 치명적인 시는 시집이 아니라 용산에 있었다" 이어서 그는 '노래'했다.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시는 사라지고 만다." (<느낌의 공동체>)

나는 서두에서 이 글은 전교조가 아니라 시를 옹호하기 위해 쓴다고 감히 말했다. 이제 나는 신형철의 '시'에 기대어 또한 감히 말하고자 한다. 전교조가 결성되고 '교육대학살'이 자행된 1989년 그해 봄과 여름과 가을의 가장 치명적인 시는 시집이 아니라 전교조에, 전교조 교사에, 전교조와 함께 한 무수한 학생과 시민들에 있었다고, 그 후 10년 20년 동안도 전교조는 시이고자 했고 어쩔 수도 없이 시적이었다고, 그러는 한편으로 전교조는 시를 배반하기도 했고 시를 꽃피우지 못하기도 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거리에서 불온한 시의 전운(戰雲)을 몰고 다니는 것은 아직도(아직은) 전교조라고, 낡은 전교조, 병든 전교조, '죽은 시의 전교조'를 부수고자하는 것도 역시 전교조 교사들이라고--.

'시'가 되살아나야 할 지친 '죽은 시의 전교조'는
젊은 날의 시인 김용택의 <섬진강> 푸른 물결에 목마르다

시인 김용택은 코웃음 칠 지도 모르겠다. 전교조가 시라니? 제발 시를 모독하지 말라고--.
그렇다. 시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묻게 된다. 전교조라는 '비시(非詩)에 낮은 포복으로 접근'(황지우 시론의 일단)해 보는 것도 낯선 시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당신은 잊으셨는가? 라고. '낮은 포복으로 접근'! 그렇다. 교설하기 좋은 높은 판관의 자리가 아니라 낮은 포복의 자세로 전교조에 접근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전교조의 멍들고 찢기고 오만하기까지 한, 그래서 그 지쳐버린 가슴이 품고 있는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 그러한 모든 것' (김수영 시 <봄밤>의 일단)을 비로소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야 전교조에 대한 당신의 날선 비판도 호된 꾸지람도 시로 꽃피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당신의 시가 '죽은 시의 전교조'를 살려내는 넉넉한 강물, 저 푸르른 섬진강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의 '시'로 하여 내 마음속에 살아 흐르던 저 '섬진강'이, 당신의 '시'가, 물막이에 막히고 고여서 썩고 끝내는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는 것이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중략)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1>--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전교조 홈페이지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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