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 (East of Eden)' - 받아들여짐에 대하여

죽음을 선택했던 스물두살의 여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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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미(gracecho)등록 2011.05.27 17:03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 – 받아들여짐에 대하여

"이모는 그럭저럭 요리를 하는데 된장찌개는 정말 못해요."

늦은 밤에 설거지를 하다가 선반 위에 놓인 뚝배기 그릇을 보았어. 그리고 몇년 전 네가 경동시장에서 사왔던 기억이 났지. 내가 끓이는 깊은 맛이 없이 싱겁고 뭔가 빠진 듯한 된장찌개를 참다못해 네가 사왔잖아. 뚜껑은 어느새 떨어져 깨져버리고 젊은 여자의 작고 암팡진 엉덩이같은 둥그런 뚝배기만 남았네.

겨울 막바지인 2월에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을 읽으며 보냈어. 오래 천천히 소가 느리게 여물을 씹듯이 읽은 셈이지. 그렇게 2월 나의 마음은 에덴의 동쪽에서 머무르고 있었어. 던져진 우리의 삶에 대하여, 사랑받고 사랑함에 대하여 인간들의 삶의 역사에 대하여 천천히 질문을 던지곤 했지. 책장을 덮고 뭐라고 정리할까 생각하며 설거지를 하다가 네 생각이 났지 뭐야. 너의 깊고 무거운 죄책감과 '치명적인 에러'라던 너의 삶.

Eden은 한 가족의 몇 세대를 거치는 이야기이면서 또한 그 안에 인류의 삶에 대한 상징과 사유를 고루 담고 있어. 아담(Adam)과 그의 아내 캐시(Cathy), 그리고 그들이 낳은 쌍둥이 아들 Caleb과 A(a)ron이 주축이고 이들에게 선지자 혹은 조언자처럼 지켜보고 같이 살아가기도 하는 Sam Hamilton씨와 중국인 하인인 Lee가 있지.

아담과 캐시는 극명하게 선악의 대비처럼 보여. 아담은 선하고 순수한 의도를 가진 남자, 혹은 인류의 근원을 뜻하고 캐시는 유혹과 파멸의 존재야. 팜므 파탈, 구약성경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부정적인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하고 양심이랄지 감정이랄지 무언가 '결여된 존재'로 그려져. 그녀의 결핍은 그녀가 온전히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하지.

캐시는 남의 선의를 결코 믿지 않으므로 자기에게 호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다 죽이고 말아. 부모를 죽이고 사랑에 빠진 남자를 자살하게 하고 남편인 아담을 죽음 근처에 이르게 하고 또한 자기 모습을 닮은 아들을 죽게 만들지. 선의를 비웃고 어리석다고 노상 말하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도 자살을 선택하지. 자기를 닮은 아들이 찾아오고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충격과 상처를 받는 것을 알자,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숨어버리기 위하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나를 먹어요, 나를 마셔요' 그런 지시대로 독극물을 마시고 먹고 죽고 말아.

아담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I love you better (나는 너를 더 좋아한단다)" 이 말에 갇혀서 살았어.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위하여 사랑받기 위하여 상처받고 방황하지만, 아담 역시 아버지가 되었을 때 아들 형제에 대한 조금 다른 식의 태도를 견지하게 돼. 아이들의 이름을 짓기 위하여 성경책에서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암시적이야. 하느님(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정성(마음)이 거절당하였다고 느꼈을 때 카인은 아벨을 죽이잖아. 이런 것이 곧 인간의 역사라는 말을 하는 거야. 칼렙은 질투심으로 사랑받고 싶어 동생 애런을 죽음에 이르게 해.

아담은 선하고 순수한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고 캐시는 악한 본성을 상징하지만 결국 인류의 역사는 선이 승하고 악이 멸하는 그런 식의 구도는 아니야. 모든 것은 공존하고 양면적이지. 아담은 후계자로서 오히려 악한 측면이 드러나는 (혹은 위악적인) 칼렙을 선택하고 또 온통 착하기만 해서 흠이라곤 없어보이는 애런은 외모는 캐시를 그대로 닮은 모습으로 그려져. 즉 캐시는 애런이 자기의 분신이라고 느끼지. 선한 아담과 위악적인 칼렙, 악의 캐시와 무력한 선함의 애런, 이렇게 대를 이어 연결되는 구도는 결국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이, 상처받기 쉬운 인간들의 인생에 선과 악은 공존한다는 거야.

애런은 창녀 어머니를 두었다는 근원적인 결핍(흠)을 견딜 수가 없어서 죽고 말아. 근원적인 죄책감을 이길 수가 없었지. 반면 칼렙은 결함이 있고 어둡고 사악하기조차 해서 그런 인간적인 측면이 아브라로 하여금 칼렙을 사랑하게 만들어.

너의 20여년의 삶에 내내 짓누르던 죄책감, 그건 어디서 왔을까. 난 사실 너에 대해 마음을 느낄 수가 없다고 차가운 아이라고 투덜대곤 했어. 그 이면에는 네가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것을 알기도 했지만 그게 그리 대수로운 것인가 그냥 넘겼어. 너의 불안하고 깊은 눈이 떠오르는구나. 감정이 물샐틈없이 꼭꼭 눌러놓기 위해 너의 행동은 늘 완벽에 가까웠지. 너를 둘러싼 사람들 중 누구도 너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네가 말하던 치명적인 에러,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관계를 엮어가지 시작하는 순간 다 생기는 것일 텐데 너는 용서가 되지 않았나 봐. 하지만 이제 아이엄마인 나조차 사랑받고 있는지 내가 거부당하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상처를 받곤 해. 태어난 순간부터 환대받지 못한 내 인생이라는 결핍감은, 가난하여 점심을 거르고 공복의 오후를 보내는 아이처럼 나를 쓸쓸하게 하더라. 

때늦은 이야기일지라도 너에게 말하고 싶구나. 너는 참 아름답고 소중한 아이였지. 사랑한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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