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놈, 죽일 놈, 경칠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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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석(tssss)등록 2011.06.03 11:20

미치겠다. 이 녀석부터 빨리 처치해야겠다. 이 녀석을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아주 클 것 같다. 그 후환을 생각하면 이 놈이 먼저 빨리 죽어줘야 한다. 그래야 내가 행복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내 행복지수가 올라가는데 지장이 많아진다.

그런데 이 놈을 처치하기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결심하는 데는 사실 큰 맘 먹을 필요도 없다. 그냥 단칼에 없애버리면 된다. 그러나 막상 칼을 빼들었어도 쉽게 내리치기가 쉽지 않다. 내리치려는 순간 마음이 흔들린다. 아주 심하게. 담배 끊는 거? 이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술 끊는 거? 그건 애들 장난이다.

이 놈은 실로 마약같은 존재다. 한 번 손대면 끊기가 힘들다. 마약이 그런 것처럼 이 놈도 처음에는 주변 사람 권유로 접하기 시작했다. 거절하기도 뭣하고, 해서 사인 한 번 해 준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망할 놈의 친구.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는 이 놈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사실 만시지탄이지만 그들 때문에 이 놈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친구 동생 녀석 하나는 시원찮은 대학 나와 취직도 못하고 백수 상태에 있었다. 그런 주제에 온갖 거짓말 해 가며 여자를 하나 사귀었는데 그 거짓말 때문에 이 놈을 애용했고 그 바람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버렸다. 뒤늦게 정신차린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친구 동생 녀석은 지금 그 빚을 갚느라고 지금 열심히 땅을 파고 있다.

또 한 친구는 불* 친구가 급하다며 급전이 필요하다는 말에 '*알 친구인데 설마'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이 놈을 주었다가 월급까지 차압 들어는 바람에 몇 년을 죽을 고생을 했다. 이 놈은 물론 친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근데 문제는 이 놈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갑도 이 놈들만 따로 모셔두는 코너가 따로 있다. 이 놈을 쓰려고 버스에 탈 때 지갑째 들이대면 한 놈만 대라고 기계가 신경질을 내기도 한다. 죽일 놈.

이 놈 때문에 원치 않는 소비를 할 때가 많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 게 우리 아닌가. 그 짓을 제일 쉽게 하라고 도와주는 게 또 이 놈이다. 설사 은행 잔고가 텅텅 비어 있어도 일정 기간에는 이 놈 때문에 별 걱정없이 막 그어댈 수 있다. 그것도 일시불로 할 것인지, 몇 달에 걸쳐 분할로 할 것인지 친절하게 선택권을 주기도 한다. 때로 난 내 결단력이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할 때가 있다고 칭찬하기도 한다. 바로 계산대 앞에서 호기있게 한 마디 할 때다. "일시불이요." 그러나 다음 순간 우유부단해진다. 무이자라는데 3개월 분할로 할 걸 그랬나?

이렇게 그어대는 걸 걱정 없이 하는 게 아니라 아주 망각할 때도 있다. 다 이 놈 때문이다. 망할 놈.

이 놈은 평소에 자기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 그러나 잊을만 하면 월말에 조용히 자기의 존재감을 무서운 우리집 결재권자에게 알린다. 어제도 모처럼 조용히 음악을 듣고 있는데 마누라님께서 두루말이처럼 긴 종이 한 장을 들고 들어온다. 장시간에 걸친 취조가 시작된다. 기분좋게 후배들과 함께 마신 며칠 전 술이 다 깨는 순간이다. 물론 그날 술값 계산을 이 놈으로 했었다. 경칠 놈.

내, 이 놈을 당장 내일 도륙을 낼 것이다. 집에서 제일 잘 드는 칼을 찾아 단칼에 두 동강이를 낼 것이다.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절대로 못할 것이 없다. 기어코 하고 말 것이다. 나는 결심한 건 꼭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꼭. 꼬------옥.

2011.06.03 11:18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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