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만에 베트남전에서 잃은 전우를 만나다!

제56회 현충일날 고 이건이 중사 묘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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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전(gooam77)등록 2011.06.08 10:46
어제는 제56회 현충일 날이다. 잊혀져간 전우를 생각하며 매년 현충일을 생각하지만 마음먹고 찾은 적은 몇 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해외에 파견 되었던 1965년 2월, 우리는 전선 없는 전쟁터인 월남에 파병을 지원했다.

파병부대명은 평화의 사도 "비둘기부대"였다. 약 2천명 여단 규묘의 부대는 1964년 10월 베트남 남단에 자리한 동양의 하와이라 부르는 "붕타우"라는 곳에서 계속된 베트남 전쟁에 도움을 준다는 의료지원부대를 이미 파견했었다.

1965년1월 원주에서 비둘기부대의 일원인 제801수송부대 창설에 나는 제대 5개월을 남긴 육군병장이었다. 사병 135명과 장교 5명의 단위부대를 편성하느라 서무병으로 지원했던 나는 많은 2차례나 지원하여 사서 고행을 맛보아야만 했다.

베트남은 이미 불란서와 80년 전쟁을 하고 제네바 협정에 의해 17도선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북은 세계적 게릴라의 명장인 호지민을 중심으로 한 월맹이 차지하고 월남은 17도선 이남을 차지하여 미군도 주둔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소위 베트콩이라는 전사들이 월남에 잔류했다. 베트남인민해방전선이란 조직에 월남은 패하고 있었다. 아무리 세계최강의 미군이 월남군과 합동작전을 폈지만 계속 밀리고 있었기에 미군을 지원할 참전용병을 원하고 있었다.

파병에 따른 일절 비용을 미가 부담하기에 용병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명분이야 "자유월남에 평화를 위해 파견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많은 지원병이 모여들었으나 신원조회와 신체검사에 불합격되어 여러 교체 지원병이 늘어나고 있었다.

대부분 용기와 전쟁과 평화라는 단어에 매료하여 참전을 지원했었다. 하나 사실은 월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문은 그들의 구정공세로 수도가 함락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 지원을 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5년 2월4일 비둘기부대는 창설되고 2월7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범국민환송대회가 열렸다. 한국의 최초 해외파견이라는 점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 국민환송대회는 파월장병과 수많은 가족들이 모여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우리부대는 비둘기부대 선발대로 해군함정에 몸을 싣고 베트남으로 행했다. 밤낮 12노트의 속도였던 군함은 14일 만에야 붕타우에 도착하여 이미 가있던 이동외교병원 전우들과 간호장교들의 눈물겨운 환영을 받으며 뜨거운 동포애를 느꼈다.
붕타우에서 월남최고 수반과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식에서 "다이한 환영합니다." 라며 태극기를 흔들어 환영해 주었다. 사이공 강가에는 너무나도 자유 분망한 남녀들의 행렬에 과연 이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나 의심이 들기만 했었다.

사이공에서 24km 떨어진 비엔호아 디안읍에 있는 주둔지에 짐을 풀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3월24일 비둘기부대 본대가 도착하여 이제는 2천명의 비둘기 단원이 평화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교량과 고아원 신축 도로건설 등이 임무였다.

4울2일 부대 전체가 베트콩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작은 손실을 냈고 적은 사망과 부상 등 큰 피해를 입고 난 후 재차 공격은 쉽지 않았다. 실전을 몇 차례 경험하고 작전에 임하면서 베트콩의 기습공격에 아군도 소수였지만 중 부상을 당했다.

비둘기단장의 구호제창 "경계철저" '살아서 돌라가자'라는 구호는, 가능한 죽지 말고 살아서 귀국하자는 단호한 결의이기도 했다. 주둔지가 베트콩의 주요 진지였음을 알 수 있었고 2km 반경이 부대였기에 베트콩 공격 예방에 힘쓰고 있었다.

베트남은 사철 열대기후로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져 있어 곳곳이 무성한 정글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그 정글 속에서 튀어나온 베트콩에 대한 방어는 불가능했다. 당시 소위 '낙엽작전'을 수행하여 수색에 임했던 기억도 새로운데 바로 고엽제였다.

1965년8월과 10월 사이 맹호와 청룡이 퀴논과 나뜨랑에 추가 파견되었다. 이제 진짜 전투부대가 파견된 것이다. 소위 월맹과의 정규전에는 참전이 어려웠지만 베트콩 소탕작전에 곧잘 참전하더니 1년도 못되어 3천명의 전사자가 나오고 있었다.

한마디로 베트콩 소탕작전에서 빈번이 실패했다. 일부는 전과를 올려 훈장도 받았지만 나와 천주교 신자 전우들은 탄산누트 공항 영안실에 가서, 수십 수백 전우들의 유골함을 향해 영령들의 영혼한 안식을 기도하곤 했었다. 그때 많이 울었다.

우리는 전투아닌 지원을 하는 우리부대 전우들이, 작전지원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전사자는 없었다. 다만 이건이 하사가 급성간염으로 치료하다 운명을 하고 말았다. 황달이 심하여 붕타우로 후송했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했다.

전부대원들은 슬퍼했다. 함께 살아 귀국하자던 그 구호가 귀에 쟁쟁했다. 1년 만에 교대하는 파견기간에서 병사를 당했다. 나는 서무병으로 이건이 하사의 병사보고서를 부모님께 보내면서 몹시도 괴로운 심정이었다. 과연 전쟁터에서 병사로 운명했다는 사실을 믿을까? 죄송하고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1966년 2월에 운명한 이건이 전우는 고국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나는 그해 3월 하순에 귀국하고 제대를 하였는데 6월6일 첫 번째 현충일 날을 맞이하여 국립묘지를 찾았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이 하사 묘소 앞에 이건이 전우가 서 있었다. 찬찬히 보고 물었더니 이건이 전우와 쌍둥이 형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저희들만 살아 돌아와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쌍둥이 형께 말했다. "동생 몫까지 부모님께 효도 해 달라."고 하였다. 어머니나 형은 말씀도 안 하시고 슬픔의 마음만 가득하신 듯 했다. 살아 돌아온 아들 전우를 보시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그 뒤로는 여러 해를 현충일 아닌 날에 참배했었다.

베트남에 파견되어 귀국한지 45년이 되는 어제의 현충일 날, 당시 부대장과 부관, 그리고 전우와 큰 마음먹고 이건이 하사 묘지를 찾았다. 그런데 이건이 전우묘 앞에는 45년 전 젊은 이건이 전우가 아닌 7순의 이건이 전우가 묘 앞에 서 있었다. 귀국해서 처음 본 전우의 쌍둥이 형이었다. 아! 참으로 세월은 가도 인연과 만났다.

이번 묘비에는 "이건이 하사"에서 일 계급 특진한 "이건이 중사"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 묘소에는 전우의 맏형과 쌍둥이 형, 그리고 형수들과 남매 조카들이 12명이나 모여 현충일 기일을 지내고 있었다. 역시 피는 진하고 뿌리는 영원한 혈육연의 단단한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더구나 46년 전에 돌아가신 젊은22살 뿌리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내내 형제간 우애와 추모로 살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었다.

부대장과 부관, 나와 전우들이 당시의 아픔을 나누고 전쟁터에서 병사라는 의문점을 다소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고 이건이 하사에 대한 글을 "강물은 흐른다."라는 내 수필 등단 작품집을 전하고 설명해 드렸다. 전우의 형제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46년 전, 젊은 기백으로 전선에 뛰어들었던 전우들이 7순의 할아버지가 되어 초노의 삶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건이 중사는 국립묘지 한가운데에서 22살의 젊은 나이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실로 가슴이 아프다. 그가 살아 있었다만 얼마나 즐겁고 기쁜 시간의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다시는 전쟁의 환경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위험한 순간이 아닌 수명대로 살고 수명대로 죽어가는 평범한 생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도 한반도에 전쟁기운이 일고 있으나 어서 빨리 한반도 평화가 다가오는 그날을 진심으로 염원한다.   

덧붙이는 글 지난 현충일날, 46년만에 베트남 전쟁에 참잔했다 운명한 전우의 묘소를 찾아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았다. 잊혀져 간 45년의 세월이었는데 전우의 묘소에서 전우 쌍동이 형을 만나 마치 전우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부대장과 부관, 그리고 전우들 몇 사람이 찾은 국립묘소에서 만남을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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