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장마 비가 그친 날이었다. 잠시 비가 머뭇거리는 틈새를 뚫고 내려오는 더위를 견디다 못하여 오후 늦게 계곡을 찾아 갔다가 오는 길에 경북 영덕을 지나면서 길가에 걸린 '군민과 함께하는 시와 음악이 흐르는 밤"이란 현수막을 발견하였다.
이 무더운 날에 시와 음악을 듣는다면 더위를 잊을 것만 같아 자연히 그리로 가게 되었다. 시작 시간은 멀었지만 더위 속에서도 군민의 아마추어 섹소폰 밴드가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었고, 마련된 자리가 거의 다 차고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덕문협지부 회원'들은 오신 손님들에게 차와 음료수를 대접하느라 바쁘게 자리사이를 비집고 다니고 있었다. 그럭저럭 시작 시간이 되었지만 주최 측에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간을 늦추고 있었다.
몇 십 분이 흐른 뒤에야 한국문협 영덕문협지부장의 인사 말씀을 있고 행사가 시작 되었다.
지부장의 인사말이 끝나고 사회자가 "오늘 행사 후원을 한 영덕군 군수님과 군 의회 의장님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경주에서 세계문화 엑스포의 개막식에 참여하시느라고 참석치 못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의 뒷좌석에서 낯선 촌부가 한 마디 한다. "미친놈들 영덕에 일하라고 영덕 사람이 뽑은 군수, 의장인데 남의 잔치에 뭐하러갔노." 금방 옆쪽에 앉은 분이 말을 받아 잇는다. "뭐하러 가긴 뭐하러갔겠어 눈도장 찍으러 갔지 그래야 다음에 공천 받을게 아니겠나."언 듯 들리는 평범한 촌부의 말이 듣기고, 또한 행사장 단상 앞에서는 누군가 내빈축사를 하러 나온 모양인데 단상에 오르기를 사양하며 사회자석에서 한사코 축사를 하겠다면서 사회자와 옥신각신 하는 것이었다. 결국은 사회자의 양보로 사회자석에서 축사가 시작 되었다..
"오늘 군민과 함께하는 시인과 음악인들의 잔치라 제가 감히 단상에 오르지 못하여 이렇게 서서 인사드립니다. 여기 오신 군민 여러분 더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오셔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영덕 결찰서 서장입이다. ......."
여러 사람의 축사가 끝나고 시낭송과 섹스폰 연주 등 행사가 시작 되었다. 야외라 하지만 주택가가 가깝고 대단히 무더웠다. 청중들도 하나 둘 떠나고 두 시간 사십 분간의 지루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은 시낭송도 음악 연주도 내게 감명을 주지 못하는 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가슴속에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감동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좀 전에 경찰서장이라는 분이 자기를 낮추며 겸손함을 쉽게 보여 주던 모습이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번쩍거리는 금단추에 금 두른 경찰모를 눌러쓰고 단상에 올라서 으시되며 목에 힘을 주어 큰소리로 축사 아닌 축사를 하는 것이 요즈음 다반사인데 평복 차림으로 겸손을 보여주고 지루하기만한 행사에서 끝까지 시인들의 시낭송에 박수치고 음악의 연주에 박자 맞추어 박수치며 행사가 끝날 때 까지 함께한 뒤에 일어서서 가까이 서있는 군민들에게 일일이 손잡으며 " 여가 나시면 언제 차 한 잔 하러 오십시오."하며 인사하는 모습은 시와 음악보다 인성의 승화 된 모습이라 감동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요즘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입신을 위하여서는 패거리를 발견하면 소속감 같은 건 여지없이 던져 버리고 어디라도 끼워드는 홀로는 서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단체마저도 소속감과 자기 확인에 급급한 사람들에 의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이며, 저속한 상업주의, 과다성취, 통속적 성공주의가 판치는 우리 주변에 돈과 권력이라면 이라면 자연, 환경, 삶의 터, 영혼까지도 팔아 치우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못 팔 것 없이 팔아 치우는 이 세상이 슬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팔 것조차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조그마한 군부의 경찰서장의 겸손과 어울림의 모습을 보았을 때 소시민으로서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다가 큰물을 담고 있는 것은 그 그릇의 낮음(깊이) 때문입니다. 낮은 마음, 겸허한 그릇에 큰 뜻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는 산(山)의 높음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바다의 큼을 말하는 것이요 또한 속이 깊은 자는 낮고 남의 높음을 탓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머리와 두뇌를 쓰는 사람보다 열린 마음과 감성, 상상과 꿈, 영감과 감격의 넓은 폭을 지닌 사람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마음으로 살고,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마음의 우주로 끌어 안아주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마음으로 감싸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뜨거운 심장이 자꾸 식어가는 이 세상에서... 환경인지, 감성인지, 시적감성, 영혼의 인지로 느끼고 말하고 ,끌어안는 사람이 요구됩니다.
바로 오늘 내가 본 영덕군 경찰서장(박기태)의 모습이 오늘 날 우리가 원하는 관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발 지금의 모습을 자리를 떠날 때 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여 관료조직의 귀감이 되었으면 하고 빌어봅니다.
그러기에 여기 서산대사의 시를 되새겨 본다.
. 어느 골동품상에서 발견된 서산대사(1520-1604, 선조 25년) 의 시비(詩碑)가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선시(禪詩)는 빛바랜 화강암에 새겨진 채 세월의 풍상을 힘겹게 이겨낸 듯 간신히 헤아려 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조선 중기 이전에 자연석에 새겨져 남한산성 어딘가에 버려졌던 것이 수집상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에 서산 대사를 존경했던 승려들이 세웠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를 백범 김 구 선생님이 독립운동의 파란만장한 소용돌이 속에서 어려운 결단의 순간순간에 되새김질했던 시구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답설야중거 踏雪野中去
부수호란행 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 今日我行跡
수자후인정 遂作後人程
눈 덮인 광야를 지나갈 때에는,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후세들의 길이 되리니... 시인 서산은 이 시속에서 역사의 길은 아무렇게나 지나치는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뼈아프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없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