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창 음반 표지 사진 ⓒ EMI 아침저녁으로 온도차가 벌어지면서 여름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정체되고 둔탁한 감정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고 거친 표면의 느낌이나 또는 이리저리 흩어져버릴 것 같은 마음의 모습과 마주한다. 계절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늘 경이로운 것은 사실이다. 이런 계절을 위한 음악으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듣는다. 예전부터 가을 초입 혹은 겨울까지 이 음악을 즐겨 들었다. 온갖 이론들이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고 꿈자리조차 편하지 못한 이즈음, 한참을 뒤적여 겨우 CD를 찾아냈다. 이전에는 네빌 마리너의 연주로 들었지만 오늘은 카라얀의 연주로 듣는다.I. Adagio - Allegro non troppo (18'50")음울한 서주, "너무 지나치지 않게"(non troppo)의 주제를 가볍게 배신하고 음악은 몹시도 음울하다. 아마 콘트라베이스이거나 어쩌면 첼로, 아무래도 좋다. 서서히 반전을 시도하는 관악기들, 트럼펫을 선두로 일제히 일어서는 관악기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은 기쁨도 환희도 아닌 슬픔의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그리고 무너지는 듯 내려앉는 현악기들 뒤 따르는 저음의 관악기와 불안한 팀파니의 두드림. 1악장을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무너지고 있는 로마노프 왕조 시대를 살고 있던 TCHAIKOVSKY의 불안과 우울, 그리고 죄와 벌에 등장하는 마르멜라도프의 독백처럼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러시아 민중의 음울함이었을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번영 이후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제정 러시아의 귀족들에게 TCHAIKOVSKY의 음악은 위안이었고 또 내부적 안일의 외부적 표상이었을 터, 림스키코르사코프류의 이국적 음악의 표현보다는 훨씬 귀족적 취향이었으리라. 점 점 나락으로 빠져드는 현악기와 꿈꾸는 듯 느린 단조의 늘어짐……. 왜 TCHAIKOVSKY는 이토록 무겁게 내려앉으려 했을까? 병약한 자신의 몸과 교사로서의 모범적 생활이 가져오는 내면과의 갈등이었을까?몰락해 가는 로마노프 왕조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무너진 농민들의 생활이 혹시 TCHAIKOVSKY의 눈에 보였는지도 모른다.갑자기 섬광처럼 번쩍이는 음악, 메트로놈 추를 빠르게 왕복시키는 템포, 전쟁처럼 오래 남는 기억은 없으리라……. 아마도 전쟁의 기억인 듯 현악과 관악기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음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음악은 마음을 흔든다. 2악장으로 이어지는 다리인 듯 음악은 이내 평온해지고 백조의 호수나 1812년 대서곡에서 언젠가 들었던 연주가 반복되며 2악장으로 접어든다.II. Allegro con grazio (7'05")2악장은 우아하다, 어울리지 않게. 그리고 짧다. 그러나 TCHAIKOVSKY는 오히려 2악장에 애착을 두었는지 악기의 편성은 간결하고 동시에 유려하다. 아마도 장마 중에 비치는 잠깐의 햇살처럼 슬픔이나 우울 가운데 오는 작은 행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2악장에도 바람은 있다. 폭풍처럼 몰아치지는 않지만 산들바람은 훨씬 넘는다. 지휘자에 따라 2악장의 표현은 사뭇 다르다. 네빌 마리너의 지휘로 듣는 2악장의 음악은 말 그대로 유려하고 우아하다. 심지어 중반부의 격한 몰아침조차도 유려함의 범위를 넘지는 않는다. 하지만 카라얀의 표현은 매우 격하다. 타악기에 중점을 두고 관악을 내세운다. 따라서 훨씬 격정적으로 출렁인다. 대륙과 섬나라의 차이인가? 러시아는 대륙이므로 카라얀의 표현이 TCHAIKOVSKY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III. Allegro molto vivace (8'46")3악장으로 가면서부터 불협화음이 등장한다. 삶에 언제나 걸쳐져 있는 불협화음…….불연속선, 불투명한 문제와 불분명한 해결 등이 아주 빠르게 또는 느리게 연주되는 현악기에 의해 표현된다. 늘 현실에서 이것을 느끼는 나는 음악에서 느끼는 불협화음은 더욱 곤혹스럽다. 그러나 이상한 끌림이 있다. 비정상적인 것으로의 끌림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 닿아있는지도 모른다. 화성을 위반한 음이 화성을 지킨 음보다 인간에게 더 강렬한 끌림을 주는 것은 우리의 삶이 부정형이며 동시에 정형화를 끈질기게 부정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우리는 늘 가슴에 불협화음 하나쯤은 가지고 살지는 않나?IV. Finale. Adagio lamentoso - Andante (9'55")4악장은 슬픔의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스스로의 절망도 아니고 또 타인으로부터 절망도 아닌 삶의 불안이며 오히려 내부적 자만의 굴절임을 TCHAIKOVSKY는 알아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가여운 것"(lamentoso)로 표현하며 느리게 느리게 그리고 격정적으로 회복하려한다. 그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음을 안다는 듯이. 악장의 구분이 감정의 흐름을 구분하지는 못한다. 표제를 Pathetique로 표현한 것은 전체적으로 이러한 느낌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확연히 구분되는 카라얀과 마리너. 슬픔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마리너의 견해가 내부의 문제였다면 카라얀의 견해는 결단코 외부의 문제인 것처럼 들린다. #비창 #카라얀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