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논쟁, 우리는 그냥 민주주의를 원한다.

정치적인 목적의 이념 논쟁 중단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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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찬(woohahahakkk)등록 2011.10.21 17:54
'자유' 얼마나 숭고한 이름인가?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수 백가지의 표정을 가지고 있듯 하나의 어휘 역시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에서 듣기만 하여도 치가 떨리는 말이 될 수 있다. 최근 붉어진 민주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 논쟁에서 그러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언어는 일종의 기호로써 상황에 따라 의미가 변할 수 있는 상징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이 용어는 '멋진 날씨에 기타를 메고 기차를 타는' 장면을 연상 시키는 것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쟁독려, 보수 등의 단어와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역사적으로 '자유'가 왜 후자의 상징을 가지게 되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보다 서구가 먼저 이 개념을 정립한 듯하다. '자유'는 처음에 저항의 의미를 가졌다. 경제적으로 지위를 높여가던 도시 중소 상공인들에게 여전히 정치적인 자유는 강력하게 제한되어있었다. 그들은 요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곧 정치적으로 참여할 권리를 얻게 된다. 다행히 정치적인 권리는 긴 역사 끝에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 되었지만, 경제적인 권리는 그렇지 못했다. 1900년대 빛의 속도로 경제의 규모는 커지고 있었고, 분배를 외치는 자들에게 경제적 기득권자들은 강력하게 '자유'를 외쳤다.

우리의 경우에는 이에 더하여, 남북 대결 구도가 작용하였다. 마치 자유라 함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인 양 비춰졌다. 당시 정부는 북한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자유가 없는 체제이자, 독재자 밑에서 모두가 괴물이 되는 체제로 그려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라는 가치를 신봉하여야 북한을 이기고 우리도 지킬 수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라는 용어 아래서 대한민국은 철저히 자유를 잃어 갔고, 그 '자유'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철장으로 가거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물론 한국식 '자유' 이데올로기 덕에 국가 전체의 부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많은 것을 잃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과연 이러한 '자유'를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쓸 필요가 있을까? 쓰고 싶은 사람은 써도 된다. 우리는 자유를 존중하는 국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교과서에는 그렇지 않다.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이 한쪽으로 편향된 가치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자유민주주의'옹호론자들은 이에 대해 누구도 신자유주의 사상이나 기득권자의 이익을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전달 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 이러한 정치적 의미를 전달하려면 학생들 주변의 교사나 학부모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용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리고 이미지의 무의식적 노출이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청소년들은 무의식적으로도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정치적 색채가 분명한 용어를 역사 교과서에 넣는 일은 재고해야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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