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대로 살 수는 없어요"

[사람&사람] 88만원세대, 비정규직, 그리고 '소설가' 안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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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철(go2thewest)등록 2011.10.31 13:48
사람 & 사람
'사람&사람'은 우리 사회 각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연재 코너입니다. 때로는 나와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낯선 모습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빌어 우리 사회를 다각도로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어디에나 있지만, 무심하게 지나쳤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야 말로 우리 경제의 기본이라는 철학을 '이야기'로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88만원 세대'라는 표현은, 너무나 구체적이기 때문에 더욱 우울한 세대 구분이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간당 최저임금 4320원 이하의 임금을 받아가며 일하고, 구멍같은 고시원에서 토익책을 벗삼아 젊음의 한 시절을 보내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꿈'이나, '열정'같은 가슴 뛰는 표현들은, 왠지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때문에 한 달 월급 80만원을 받으며, 소설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는 안준원씨(28세)를 만나기 위해 대학로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필자는 '생활고, 꿈과 현실 간의 괴리, 비정규직의 삶' 등과 같은 우울한 단어들을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안씨의 청춘은 그렇게 무거운 단어들로 표현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는 88만원 세대니까, 그냥 88만원으로 하시죠."

보습학원강사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안준원씨가 원장에게 능청스럽게 건넨 말이다.

안씨는 학원 강사로써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 일에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소설 집필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을 시간, 여행을 다니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 등 노동외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안씨에게는 파트타임 잡이 절실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임금이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면 족했다.

정규철 기자 (이하 정) : 일반 회사원이나 직장인들에 비해서 적은 임금인데, 생활에 어려움은 없는지?

안준원씨 ⓒ 정규철


안준원 (이하 안) : 무엇보다도 욕구를 제어하는 게 중요하다. 욕구를 제어하다 보면 내가 점점 생활에 맞게 진화하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마음 놓고 술을 먹을 수 있는 값싼 술집을 본능적으로 찾게 되고, 좀 더 싸게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재 살고있는 집은 부모님께서 얻어주셨고, 동생과 함께 관리비 등만 내고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주거비용은 지출이 없는 상황이다. 동생이 취업을 하거나 혹시라도 결혼을 하게 된다면 다시 내놓아야하는 상황이다. 그럴 경우 당연히 독립을 할 것이다.

정 : 그렇다면 집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를 원하지 않나?

안 : 물론 처음에는 그랬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내 꿈을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렸다. 그림을 그리듯이 말이다. 어느 정도의 습작기를 거쳐서, 등단을 하고, 소설가로써의 인생을 살아가다가, 나이가 먹은 후 대학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늘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매뉴얼대로 살수는 없죠"

정 : 소설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 : 꾸준히 쓰고, 읽는다. 또한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세상을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을 한다. 모든 사고, 모든 행위들이 소설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

정 : 얘기를 들어보니, 소설가라는 꿈을 이루는 데에는 경제적인 부담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이점이 있는 것 같다.

안 : 그렇다. 하지만 어떤 꿈이든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 좀 다르다면, 그런 경우 가장 중요한 건 경제적 여건이 아니다. 물론 돈이 없다는 건 가끔, 내 사고를 정지시키기도 한다. 애인이나 아는 사람을 만날 때도, 그 사람과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때면, 언제나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한될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큰 문제는, 매시간을 온전한 나의 의지대로, 나의 계획대로 알차게 채워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정 : 그건 무슨 뜻인가?

안 : 사회는 이미 수많은 삶의 매뉴얼들을 준비해놓고 있다. 좋은 회사에 취직할 마음으로, 평범한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준비하고 싶다면, 언제든 공부를 시작할 수 있고, 수많은 학원을 다닐 수 있으며, 습관처럼 배우고 익히고를 반복할 수가 있다. 일상이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관련된 학습체계가 이미 잡혀져있고, 철저한 계획이 이미 잘 짜여져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전형적인 인간을 양성해내는 시스템은, 이 사회에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안 : 하지만 소설가나 작가 같은 경우는 사회가 마련해 준 것이 없다. 그러한 준비과정을 자신이 스스로 모색해야 하고, 옳다고 판단한 것들을 정해서 하루하루를 습관처럼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의지의 문제로, 경제적인 여건은 그 이후의 문제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돈 되는 일'이 아닌 직업들에는 좀처럼 인색하다. 창조적 활동을 하기 위해 예민한 감수성을 키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사회의 부조리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대학은 아직 가능성이 있어요"

준원씨는 학원 강사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쳤던 6개월 동안, 준원씨는 초등학생들이 우리 사회가 가진 일반적 잣대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네 집이 더 부자고, 누구네 집이 가난하고, 그런 경제적 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 사는 아이에 잘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인식이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흡수된다는 말이다.

정 :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안 : 나이가 먹은 뒤에, 대학교를 세울 것이다. 난 지금 초중고 제도권 교육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학원에서 초중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한국은 사교육보다도, 초중고 공교육 시스템 자체의 문제가 더 크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은 현재 취업연수원으로 기능하고 있어서 문제긴 하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연애'할 자유라도 보장되며, 충분히 한 사람의 인생관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준원씨는 시종일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경쾌하게 이야기를 해나갔다.

하지만 돈을 '버는' 일이나, 돈을 '쓰는' 일, 혹은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냄새도 꿈냄새도 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꿈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외롭고 힘겨운 과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준원씨는 투정을 부린다거나 그러한 현실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바로 옆에 서서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음 책방'에 들렀다. ⓒ 정규철


인터뷰를 마치고 준원씨와 함께 서점에 들렀다. 책을 고를 때의 준원씨를 살펴보니, 경쾌한 리듬으로 대화를 나눌 때보다도, 오히려 눈동자가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꿈이 없다는 것은...

작가이자 시인인 이상은 말했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한 일일 뿐만 아니라 더 슬픈 일이다'라고.

'비밀'이라는 단어를 '꿈'이라는 단어로 바꿔도 이 문장은 여전히 성립한다.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만큼의 충분한 여유가 없는 사회, 삶의 방식에 있어서 다양한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는 그런 사회는 언제나 가난하고 빈곤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준원씨처럼 자신있고 경쾌하게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가슴 속에 언제나 비밀같은 꿈 하나 정도는 담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참 부러웠던 준원씨의 한마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 꿈은 상세하고, 구체적이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휴먼경제(http://www.human-biz.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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