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오지 않은 강의실에서 흐뭇했던 이유

[주장] 사회변혁은 비가 오는 것과 같다

검토 완료

임승수(reltih)등록 2011.11.01 14:28
때는 2011년 10월 31일 오후 6시 30분이 조금 넘어선 시각. 저는 <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라는 주제로 대학생 대상 강연을 하기 위해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213호 강의실에 앉아 대기 중이었습니다. 지난 5월에 <청춘에게 딴짓을 권한다> 책을 출간한 이후 이 주제로 대학생 강연을 많이 했고, 이날도 건국대학교 학생들에게 '딴짓'을 권하기 위해 강의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현지적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오후 6시 30분을 조금 지났는데도 강의실에 아무도 없는 겁니다. 주최 측 학생들은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표정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주최 측 학생 한 명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습니다.

"신청한 20명의 학생들이 모두 다른 일 때문에 못 온다고 하네요. 죄송합니다."
"아, 그래요? 괜찮아! 괜찮아! 일 하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왔던 길을 그냥 다시 가면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정말 죄송...."
"나중에 평가를 잘 해서 앞으로 개선을 하면 돼요."
"네에...."
"참가비가 있는 행사의 경우 미리 참가비를 받으면 사람들이 갑자기 안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아무래도 돈이 아까워서라도 올 테니까요."
"아! 그렇군요. 그런 방법은 생각 못했네요. 감사합니다."

아마 이런 대화들이 오갔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진짜 괜찮은 표정으로 학생과 대화했는지는 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알 수 없지요. 거울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까요. 어쩌면 안 괜찮은 얼굴로 괜찮음을 연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은 거울이 없더라도 자신의 마음속 얼굴 표정은 잘 압니다. 당시 제 마음속 얼굴 표정은 괜찮을 뿐만 아니라 무척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생각이 납니다. 마음속 얼굴이 웃고 있던 이유가 비단 학교 건물 여기저기에 붙어 있던 강의 홍보물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홍보물이 곳곳에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어쨌든 열심히 했구나. 열심히 했는데 안됐으면 어쩔 수 없지.'라는 알량한 생각 때문만은 아닙니다.

흐뭇했던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조금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회변혁은 비가 오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비가 오기 위해서는 하늘에 뭐가 끼어야 하지요? '구름'이 끼어야 합니다. 하늘이 먹구름이 끼면 사람들은 비가 올 수 있겠다고 예측을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름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형성됩니다. 지표면에서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가 태양열에 의해 가열되면 가벼워져서 상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압이 낮아져서 부피가 늘어나고 기온이 낮아지게 됩니다. 기온이 낮아진 공기는 품을 수 있는 수증기량이 작아지기 때문에 이 때 생기는 여분의 수증기가 이슬로 응결되어 구름이 됩니다.

이러한 여러 조건이 맞물려서 구름이 생성되듯이, 사회변혁의 구름 격인 '객관적 조건'도 다양한 현상들이 서로 맞물려서 형성됩니다. 비정규직에 고통 받고 청년실업에 고통 받고 정리해고에 고통 받고 4대강 환경파괴에 고통 받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분노가 쌓이고 모이고 얽히고설켜 '객관적 조건'이라는 구름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구름이 생겼다고 해서 무조건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름이 비가 되기 위해서는 '응결핵'이 필요합니다. 구름 속 이슬들이 먼지 같은 작은 '응결핵'을 중심으로 뭉쳐서 좀 더 큰 물방울이 되고 이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면 비가 되는 것이지요. 사회변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자동으로 사회가 변화하고 진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도 응결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회 변화와 진보에서 응결핵의 역할을 하는 것은 '주체 역량', 즉 '사람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어떤 한 탁월한 개인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 하더라도 그 영웅이 먹는 밥은 평범한 농부가 만드는 것이며 그 영웅이 입는 옷은 평범한 재단사가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역사에서 뛰어난 지도자가 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뛰어난 지도자라 하더라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쳐놓은 울타리를 넘어서서 무언가를 이뤄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흐르는 방향은 바로 그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느냐로 갈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직업이 무엇이고 어떤 배경을 가졌든지 매우 고귀하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구름이 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큰 수박만한 응결핵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구름 이곳저곳에 알알이 박혀서 자리를 잡고 있는 아주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수많은 작은 먼지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구름 전체가 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이제 제 마음속 얼굴이 왜 흐뭇한 표정을 지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2011년 10월 31일 저녁에 건국대 문화대학 213호 강의실에서 '응결핵'을 만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구름이 잔뜩 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응결핵이 돼야 합니다. 모두가 똑같은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무역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사회에 진출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가 돼서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고 여론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민을 가지고 진보적인 정당이나 단체에서 활동을 할 수도 있고요. 자신이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선택하고 그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매력 있는 존재가 된다면 응결핵을 중심으로 수증기가 모이듯 자신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올바른 생각을 나누고 작은 것이라도 실천할 때 결국 비가 내리듯 세상은 바뀌는 것입니다.

박원순의 서울시장 당선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응결핵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야 말로 진정한 사회변혁의 비가 내릴 것입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