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이지 않은 보편적 시각

영화 "여섯개의 시선"을 통한 불편한 보편됨을 비판

검토 완료

배기현(kihean90)등록 2011.12.14 09:35
시선. 시선의 사전적 정의는 여러 가지이지만 <여섯 개의 시선>에 쓰인 시선과 부합하는 정의를 찾아보자면 '눈동자의 중심점과 외계의 주시점을 연결하는 선' 정도일 것이다. 우리의 눈동자가 바라보는 대상의 중심과 연결되는 일직선. 우리는 그 선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한다. <여섯 개의 시선>은 '시선'의 정의와 부합하는 방향으로 카메라의 앵글을 잡고 있다. 어린 아이가 치과에 누워 수술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세상. 네팔 출신 노동자 찬드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담아낸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아이는 다가오는 의사선생님과 토끼 분장을 한 간호사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찬드랴는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여섯 개의 에피소드가 병렬적으로 연결된 이 영화는 상대적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지나쳤던 의식적 차원의 문제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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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시선>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에피소드 중 네 번째 이야기와 여섯 번쨰 이야기인 '신비한 영어나라'와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다른 소재를 에피소드로 다루고 있다. '신비한 영어나라'는 비이성적 영어 교육 열망에 자신을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수술대에 오르는 종우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네팔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이지만 한국인으로 오해받아 행려병자로 취급당하여 6년간 정신병원에 감금당하였던 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얼핏 보면 완전히 다른 소재들이지만 박진표 감독과 박찬욱 감독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던지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라 사료된다.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시각'이 타인에게 폭력으로 행사되고 있는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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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시각'이라는 표현은 모두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 보편적 시각에서 사건의 도덕적 책임을 묻고, 보편적 시각에서 문제의 소지가 없음을 판단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보편적 시각'은 문제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여섯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을 주목하여 보자. '믿거나 말거나'이다. 우리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설마 저게 사실일까?'라는 생각이 들법한 일이라는 말이다. 좀 더 깊게 생각하여 보자. '믿거나 말거나'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이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사회, 그리고 구성원인 우리 모두들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이러할 것이라는 보편적 시각. 그 시각에서 벗어난 찬드랴 씨는 한국인이라 결론내리는 사람들. 말을 더듬으며 자신을 네팔인이라 주장하자 친절 혹은 약자 구제라는 명분하에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얼굴과 이름만 다른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보편적 시각)이 적용된 결과는 우리의 보편적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보편적 시각에서 행해진 행위가 폭력으로 찬드랴에게 다가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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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에피소드 역시 여섯 번째 이야기와 동일선상에 서 있는 이야기이다. 어린이의 영어 발음 교정을 위한 치과. 간호사들은 어린이에게 친화감을 주기 위해 토끼 옷을 입고 있으며 의사와 아이의 어머니는 수술 내내 아이에게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한 일이야'를 반복한다. 잔인한 수술 장면을 카메라 렌즈에 그대로 담아낸 박진표 감독의 의도는 아마 보편적 시각이라 불리는 행위들의 내면적 폭력성을 좀더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찌되었든 수술 내내 아이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그 와중에 아이의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말한다. '종우를 위한일이야.' 수술이 끝난 후에 아버지는 다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당신 수고했어. 종우 맛있는거 사줘." 우려를 표하던 아버지마저도 결국 아이를 위한다는 묘한 논리속에서 보편적 시각을 따르는 사람의 일원이 된다. 혹자는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며 사회의 보편적 시각이 아니라 항변할지도 모른다. 과연 '신기한 영어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 시각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굳이 유창한 영어발음을 위해 수술을 받아야만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글보다 먼저 배우게 되는 알파벳. 영어를 위해서 어린 나이에 타지 생활을 거쳐야만 하는 학생들. 이런 모든 현상들이 '신비한 영어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일맥상통하다. 미국인들이 신경쓰지 않는 영어 발음을 위해 이 사회는 '외국인과 같은 발음'을 보편적 시각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규정한 채 이 땅의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중이다. 결국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보편적 시각은 또 다른 모습의 폭력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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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왜 모두에게 공통된 시각을 강요하는 것일까. 아이의 영어 발음이 유창하지 않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부모의 모습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회에서 얼마나 모순인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습과 다르다 하여 그녀의 국적마저 타인에 의해 강요당하는 사회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하지만 <여섯개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점은 그런 모습들에서 찾아지는 폭력성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도 보편적 시각을 거스르지 않는 기준에서 삶을 살아가며 타인을 대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보편적 시각'이라고 불리는 시선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시각'이란 다수결의 논리하에서 비이성적인 면마저도 합리화 시키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인해 보편적 시각내에 내재된 폭력성으로 희생되는 타인들이 우리의 이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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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보편적 시각이 이성의 논리를 잃고 있다면 사회의 최소한으로 기능하는 보편적 시각으로서의 위치를 잃은 셈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배려가 철저히 부족한 사회가 현 한국사회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거부하며 타인의 시선에 서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그들에게 강요하며 이런 강제성(폭력성)은 어린이,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적용된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 폭력성이 두드러진 사건들을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면 그런 사건들 역시 '보편적 시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믿거나 말거나'스러운 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깨달음은 우리가 보편적 시각이라는 명분하게 가하고 있는 폭력성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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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폭력을 당하였으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에 응하는 찬드랴. 우리가 <여섯개의 시선>을 통하여 얻어야 하는 메시지는 개별적 사건에 대한 반성보다 찬드랴의 미소와 같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번쯤은 우리들의 보편적 시각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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