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가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
- 용비어천가 2장 -
지금 마음같아선 용비어천가가 아니라 시일야방성대곡을 부르짖고 싶지만,
흘러내리면 사라지는 사람의 눈물과 달리 흘러내리는 펜의 눈물은 글자로
남기에 분통한 마음을 다잡고 축구계의 작금의 사태에 대해 말한다.
- 분통을 터뜨릴 수 밖에 없는 한국축구의 현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최강희 전북감독이 선임되었다. 겉으로 봐선 나쁠 게
없는 오히려 최강희 감독의 능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환영할만한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일반적인 언론은 우호적이다. 외국인 감독을 원했던 불만의
목소리도 있지만 최강희 감독이라면 수긍할 수 있다는 여론 또한 지배적이다.
하지만 한국축구를 진정 사랑하는 축구팬이라면 지금 이 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가슴이 아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한국축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축구의 뿌리는 K리그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알고 있는가?
맨유에 박지성, 셀틱에 기성용, 함부르크에 손흥민, 혹은 더 멀리 세계 최강
바르셀로나에 유망주로 백승호, 장결희, 이승호가 있다해도 우리 곁에 있는
건 K리그다. K3리그 경기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선수들의 목소리만이 울려퍼
지는 텅빈 경기장 속에서 땀에 젖은 유니폼이 마를 새도 없이 뛰어다니다가
휘슬과 함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승리에 환호하고 패배에 고개를 떨굴지
라도 그들은 우리 곁에 있는 K리그 선수이다.
잉글랜드에 프리미어리그, 스페인에 프리메라리가, 독일의 분데스리가,
이탈리아의 세리에가 있다면 한국에는 K리그가 있다.
당신은 이 사실을 진정 알고 있었나? 아니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지식에
만족했을 뿐인가? 그렇다면 이 사실 또한 알고 있는가? 뿌리가 뽑히거나
상하면 그 나무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면 다시 한번 당신에게 묻고 싶다.
지금, 바로 지금 한국축구의 뿌리가 뽑히고 있다. 당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 한국의 퍼거슨경 최강희
▲ 최강희 감독 전북 ⓒ 스포탈코리아
2002년 월드컵 이후 K리그는 반짝 특수를 누렸다. 월드컵을 통해 축구의
묘미를 알게 된 팬들이 K리그를 찾았다. 하지만 세계적인 수준에 눈높이를
맞춘 팬들의 수준에는 투박하고 거친 K리그는 한참 부족해보였을 것이다.
다시 뉴스에는 텅빈 K리그 관중석이 자료화면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팬들
사이에서는 한국축구는 인기스포츠라도 K리그는 비인기스포츠라는 자조섞인
푸념이 떠돌았다. 그 당시 K리그에는 인기를 끌 수 있는 콘덴츠가 부족했다.
세계수준과 실력차도 있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경쟁스포츠인 프로야구
만 해도 세계적인 수준과 실력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기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팬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흥미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의
갱신, 라이벌 구도의 정착, 감독들의 언론플레이등 팬들을 자극하는 콘덴츠가
풍부했다. 바로 그 부분이 K리그는 부족했다. 마치 신토불이처럼 한국축구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 섞인 캐스터의 멘트는 도리어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런 침체된 분위기 속에 K리그 팬들을 흥분시키는 소식이 들려온다. 바로
2006년 전북현대의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이었다. 이는 K리그팬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2004년 국내최강을 자부하던 성남일화가 알 이티하드
에 충격적인역전 우승을 허용한 이후 중동자본이 중동축구에 밀리던 K리그는
아시아에서조차 그 경쟁력을 의심받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시기에 전북은 국내리그에서 조차 우승을 해본 경험이 없던 비주류였다.
하지만 전북은 감바오사카, 상하이선화, 울산현대 같은 한중일 대표클럽을 모두
역전승으로 물리치는 놀라운 행보로 결승에 올랐고 알카라마의 홈에서 우승을
거두면서 팬들의 놀라움은 흥분으로 바뀌었다. 바로 그 전북을 이끈 감독이
최강희 감독이다. 그 후 세계클럽선수권에 진출하여 세계의 강호와 당당히
맞서는 전북을 보며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 뜨뜻미지근했던 K리그의 시선을
확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고 또한 아시아에서 우승하고 아시아를 대표해 세계
대회에 나가는 우리 클럽팀은 K리그 팬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클럽
축구의 세계화에 눈을 뜬 K리그는 점점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팬들은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300만 관중 돌파라는 위업을 세운 올해,
전북은 닥공이라는 팬들을 열광시키는 경기력과 함께 리그제패, 아시아챔피
언스리그 준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고 또한 끝없는 믿음으로 이동국
선수를 부활시킴으로써 K리그에 인간승리의 이야기를 첨가시켰고, 봉동이장
이라는 별명답게 팬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으로 K리그 흥행은 물론 K리그가
나아가야할 방향까지 이끌어주었던 선구자가 바로 최강희 감독이다.
이것이 바로 최강희 감독이 한국의 퍼거슨이라고 불리우는 이유이다. 단지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다. 헤이젤참사로 5년간 국제대회참가금지로 인해
현대축구의 흐름에서 뒤떨어지게 된 잉글랜드 축구를 9년만에 유럽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부활시킴으로써 잉글랜드 축구의 영웅이 된 퍼거슨경처럼
최강희 감독 역시 침체에 빠진 K리그를 부활시킨 영웅인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최강희 감독은 그냥 전북의 감독이 아닌 K리그의 자존심
그 자체인 것이다.
- 월드컵과 K리그 무엇이 더 한국축구에게 중요한가?
그런 최강희 감독을 축구협회는 오늘 오전 국가대표감독으로 임명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윗선의 대승적 차원이라는 명분아래 떠밀려서 말이다. 이는 마치
잉글랜드 국가대표가 어렵다고 퍼거슨 감독을 맨유에서 차출하여 국대감독에
앉힌 꼴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퍼거슨 감독에게 그렇게 할 리도 없고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의 최강희
감독은 그런 꼴이 되어야 하는가? K리그가 정녕 그렇게도 우습게 보였단 말인가?
그럴 때 나오는 변명은 이럴 것이다. 한국축구의 위기이다. 이 위기를 구해줄
인물이 필요했다고. 그렇다면 그들에게 묻고 싶다.
월드컵에 한번 못나가는 것이 과연 한국축구의 위기인가? 아니면 축구협회
그대들의 위기인가?
오히려 한국축구의 진정한 위기는 K리그 승부조작 사건과 2013년부터 시행될
K리그 승강제 정착이라는 과제에 있지 않을까? 이는 K리그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자 과제로서 이 두 가지 과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한국
축구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과제에 현재
축구협회는 뚜렷한 대안이나 대책을 내놓은 것이 없다.
더불어 그들이 말하는 지금 한국축구의 위기라는 이때에 축구협회의 행보는
어떠한가? 밀실행정을 통한 조광래 감독의 해임과 더불어 주먹구구식 최강희
감독의 선임. 이것이 축구협회가 한국축구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그들이
선택이었다. 나는 오히려 묻고 싶다.
이런 후진적인 축구 행정으로 운영되는 한국축구가 월드컵에 나가야할 당위
성은 과연 무엇인가?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한국축구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K리그가 무너지면 한국축구는 틀림없이 약해진다.
현재 K리그의 상징인 최강희 감독이 이런 대우와 절차를 통해 대표팀 감독에
강제 임명된다면 이는 곧 선례가 되고 앞으로도 제2의 제3의 최강희 감독은
탄생될 것이다. 그로 인해 당연히 K리그는 대표팀에 항상 우선순위에 밀리게
되는 천덕꾸리기 취급을 받게 될 것이고 이에 실망한 팬들은 K리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축구의 뿌리인 K리그의 운영은 어려워질 것이고
더더욱 모기업의 자본에만 의존하게 되는 K리그는 그 자생력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올해 일어난 승부조작과 같은 사건 또한 다시 일어나
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 축구계에도 나꼼수가 필요하다
▲ 이명박대통령과 정몽준 의원 조찬을 마치고 ⓒ 뉴시스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축구팬들은 축구협회에 정치가 개입된다는 것이
어떠한 사태를 초래하고 어떠한 결실을 맺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치 나꼼수를 통해 현정부의 실태를 국민들이 알아차리게 된 것처럼 말이다.
마치 경제발전을 슬로건으로 집권한 이명박정권처럼 외교력과 경제력으로
국내 축구계를 장악했던 정몽준 의원과 그 세력의 장기 집권은 축구계를
이렇듯 원칙과 절차가 무시되고 한국축구를 위한 진정한 방향이 아닌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방향으로 축구협회를 운영하는 현실을 초래했다. 이젠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축구협회의 개혁에 축구팬들의 힘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열성적인 축구팬이라하더라도 축구협회장을 뽑는 선거에
표를 행사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한국축구협회 뿐만 AFC나 FIFA에서
꾸준히 새어나오는 부정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축구협회의 패쇄성을 이유로 이를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통해 달라진 팬들의 변화된 시선을 축구협회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팬들에게 또다른 짐을 지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국가대표팀의
결과뿐만 아니라 축구 협회가 돌아가는 운영과 더불어 축구협회의 향방을
가르는 선거에 있어서도 팬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자그마한 정보라도
축구팬이라면 SNS를 통해 쉽게 공유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축구협회에게는 압박이 될 것이고 또한 그들의 행보에 고려해야할
하나의 변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축구협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축구인들의 각성이다.
축구팬들은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더이상 팬들에게 K리그를 사랑해달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축구팬들은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K리그를 진정 사랑해 달라고.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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