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레니엄 영화포스터 ⓒ 소니 픽쳐스 릴리징 브에나 비스타 영화㈜
보통의 삶은 욕망의 실현과정이다. 욕망이란 말뜻에는 부족함과 貪함, 즉 내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을 가지는 것과 욕망이라는 표현을 겉으로는 가능한 자제하려 한다. 그 이유는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과 그 무엇을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의 외부적 표현인데 이것은 상대방을 가정한 말일뿐더러 그 상대방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온전히 나의 욕심만을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인류는 욕망을 통제하고 그것을 죄악시하는 모습을 '도덕' '선'이라고 설정하여 그것을 삶의 좌표로 지향해 왔지만 사실 욕망은 세월이 거듭될수록 두터워졌고 형태를 달리하여 우리 내부로 깊숙하게 파고들어와 버렸다. 그러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욕망의 통제도구가 '종교'인데 그 조차도 세월이 지나면서 인간 욕망의 도구로 전락하여 오히려 욕망을 합리화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이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영화는 이러한 욕망의 기괴한 변화를 따라잡으려 한다.
오프닝 크레디트 타이틀
컴퓨터 그래픽의 몰핑기법으로 만들어졌으리라고 추정되는 오프닝 크레디트 타이틀은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뒤 다시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물론 처음에는 무엇인가 기괴하고 충격적인 장면 정도로 보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었다. 검은 색으로 처리된 남녀의 몸이 연출해내는 장면들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의 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는데 때로 매스껍고 선정적이며 또 때로는 아름답기도 했다.
시퀀스
밀레니엄이라는 잡지의 제호에서 풍기는 시간적 공간과 음울하고 추운 날씨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적 사건으로 쉽게 진입하는 장치로 이해된다. 007의 히어로 다니엘 크레이그(미카엘 블롬크비스트 역)는 이 영화에서 첩보영화의 액션배우를 잠시 접고 다양한 감정을 표출해야하는 잡지사 기자로 등장한다. 자신이 쓴 기사로 하여금 송사에 휘말려 재산과 명예를 하루아침에 날린 그에게 새로운 제안이 들어오고 딱히 피하거나 흔쾌히 수락하지도 않은 그 제안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또 다른 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루니 마라 분)는 이 미카엘의 뒷조사를 담당하는 기이한 여자로 등장하여 상당시간 갱목으로 연결된 철도처럼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만 대단히 밀접한 관계로 평행상태를 유지시킨다. 이 장치는 관객에게 두 인물의 객관적 모습을 인지하면서 동시에 연결고리를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 속으로 깊숙이 흡인될 수 있도록 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국가는 스웨덴이다. 스웨덴은 북유럽의 복지국가로 누구에게나 복지의 혜택이 가도록 사회구조가 만들어져 있지만 영화에서처럼 리스베트가 후견인에게 당하는 폭력은 복지의 그늘이라 할 만하다. 어쨌거나 리스베트의 삶에서 후견인이 교체되고 새로운 후견인이 된 버저먼(요릭 밴 와게닌젠 분)은 살아있는 악마 그대로의 모습이다. 물론 영화에서 리스베트가 통쾌하게 복수를 하지만 그 악마적 모습은 관객에게 살아 움직이는 욕망을 실감하게 하기에 충분한 장치였다.
스토리
스웨덴의 오래된 명문 집안 방예르 가문의 대표자격인 헨리크는(크리스토퍼 플러머 분) 비록 소송에는 졌지만 주인공 미카엘의 예리한 분석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자서전과 함께 오래된 집안의 미스터리인 손녀 하리예트 실종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게 된다. 이 일을 맡기기 위해 미카엘의 뒷조사를 담당한 사람은 리스베트였고 그 둘은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야 비로소 만나 힘을 합쳐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게 된다. 약간의 반전이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예견할만한 결론으로 생각된다.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수많은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살인의 장면은 성서의 구절을 그대로 옮겨 놓은 살인이었다. 서양이라는 문화와 구조에서 기독교는 이제 삶 그 자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서를 모방한 살인은 많은 영화에서 차용하여 사실 새롭거나 놀라운 일은 이미 아니다. 구약성서에는 살육과 그 배경이 되는 욕망의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이것은 그 옛날 성서가 기록되던 시절에 이미 욕망으로 말미암은 사건으로 세상이 혼탁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좀 더 교묘해 지거나 혹은 좀 더 음험해졌을 뿐,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인간 욕망의 본질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방예르 가문은 결국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세상의 축소판이었으며 사라진 소녀 하리예트는 욕망으로부터 여전히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많은 약자의 모습일 수 있다.
리스베트의 절망
남녀의 육체적 사랑은 정신적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에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욕구해소이며 동시에 수컷 또는 암컷으로 표현될 수 있는 동물로서의 인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 미카엘은 잡지사 편집장 에리카 베르예르(로빈 라이트 분)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재판에 지고 방예르 가문과 연결되면서 그녀로부터 잠시 멀어졌고 하리예트 실종 사건의 해결 중에 만난 리스베트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리스베트는 불우한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미카엘에게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선물과 카드를 준비한다. 이러한 리스베트의 행동은 인간이 욕망으로부터 순화되는 과정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마침내 사랑이라는 단어에 근접하려는 행동임을 영화는 말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미카엘은 모든 사건이 해결 된 후 한 때 육체적 관계를 나눈 리스베트를 잊어버리고 편집장 에리카에게 돌아서 버렸다. 이 모습을 확인한 리스베트의 절망은 단순히 실연의 슬픔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그 모습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절망, 이를테면 한계상황이나 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마주한 것 같은 좌절감이 문득 스쳤다면 이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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