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산 등어리의 늙은 소나무

나무는 어떻게 향기를 가지는가?

검토 완료

송인규(songmoses)등록 2012.01.19 11:22
가령산 소나무

괴산에는 500미터 이상, 1천 미터에 이르는 크고 작은 산들이 대략 35개나 된다. 12월 12일, 화양동계곡에 끝에 있는 가령산(642미터)에 올랐다. 산등선을 따라 올가미 모양으로 한 바퀴 도는 데 두세 시간이면 끝낼 수 있어서 등산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이 바람을 쐬어가며 아기자기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운동효과도 만점인 좋은 산이다.
바람이 세게 부는 산등성이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고고한 품격,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단단히 서있다.
"이 소나무들은 이 시대를 사는 어떤 현자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서 많은 것을 알고 있겠지. 세월의 바람 속에 묻어오는 역사를 고스란히 경험했을 것이다. 60년 전의 한국동란의 피비린내를 맡았을 것이고 밤낮없이 치열했던 전투를 목격했으며 공습과 폭격의 포연을 마셨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 기울어가던 조선말기와 일제시기의 일들도 다 겪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십 수 년 전부터는 저 중국대륙의 황사바람에 실려 오는 매캐한 화학 물질에 노출되어 트라우마를 입었을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 변화와 맞서 싸우며 강한 생명력으로 끈질기게 서있는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소나무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새롭고 재미난 사실들을 조금 알게 되었다. 

뒤바뀐 청춘
아래 계곡과 중간의 산허리 근처에는 키가 크고 곧게 선 소나무들이 많다. 이들은 산등성이에 있는 소나무들의 손자나 증손자임에 틀림없다. 산 위에서 솔방울이 터지면 바람에 날린 씨들이 아래로 떨어져 발아하고 무럭무럭 자란다. 충분한 수분과 영양을 받은 이 손자 나무들은 척박한 산 위에 있는 할아버지들과는 전혀 다른 종자인 것처럼 모양새가 딴판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큰 덩치가 싱그러운 빛을 잃고 비실거리다가 어느 해 봄부터는 새순을 내지 못하고 모든 잎들이 떨어지고 만다. 살았을 때부터 껍질피부에 잔뜩 서식하던 벌레들로 삽시간에 진액이 수탈되고 속살까지 파 먹힌 후에 불과 몇 년 만에 큰 몸은 땅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만다. 푸석한 그 몸은 이내 작은 미생물과 식물의 뿌리에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산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할아버지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생을 허무하게 마친다. 산 아래서 세대는 가고 또 다음 세대로 바뀌어도 산 위에 할아버지들은 아직도 푸르고 강건하다. 앞으로도 몇 백 년을 더 살게 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번식도 청춘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 소나무들이 맡아서 한다.
왜 청춘이 뒤바뀌었을까? 왜 산 위의 노인 소나무가 식지 않는 푸른 청춘일까?
단 한 가지 이유 밖에 없다. 높은 곳 산등어리 바람 부는 데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식물은 뿌리 내린 곳이 그의 운명이 된다.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를 그 몸으로 다 받으며 여름의 강렬한 햇살, 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견디면서 그들 안에는 시련만큼 강한 저항력이 응결된다. 그들은 바위틈 낭떠러지에서도 뿌리를 내린다. 그 뿌리는 단단한 바위를 쪼개며 아래로 뻗친다. 그들은 땅 위에 드러낸 몸의 키보다 몇 배나 더 긴 뿌리의 키를 땅속에 숨기고 있다.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자라면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나 푸르고 병들지 않는다. 소나무를 해치는 벌레나 병들은 그 혹독한 환경에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썩지 않는 향기로운 몸
가령산 등반로를 따라 한 바퀴를 돌아 하산 방향을 잡고 내려오는데 누가 그랬는지 소나무의 밑둥 하나를 잘라갔다. 중심줄기에서 약간 벌어진 죽은 가지인데 그 잘린 둥치의 붉고 선명한 나이테 줄이 참 아름답다. 너무 촘촘해서 셀 수 없는 나이테는 5센티미터도 안 되는 반경 안에 백 개가 넘게 빼곡히 들어차 있다. 송진이 굳어 잘 익은 관솔은 꽤나 단단하여 돌을 자르듯 톱질하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이 오래된 소나무 죽은 가지를 탐한 사람은 누구일까? 자연을 파괴하는 자라고 욕을 하기에 앞서 그 귀한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애석함이 더욱 컸다. 그는 영혼을 만족시키는 행운을 가져가서 좋겠다. 그것으로 그는 무엇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아마 그 집에서 제일 귀한 곳에 자리를 잡고 짙은 향기를 내뿜고 있겠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 년을 간다는 구상나무처럼 이 오래된 소나무 가지는 어떤 이유에선지 죽게 되었으나 결코 썩지 않고 산몸에 붙어 서서히 그 자신이 역사가 되고 화석이 되어갔던 것이다.
거센 비바람에 잔가지가 꺾였던지, 화마가 휩쓸고 간 후에 가지의 일부가 타버렸던지, 벼락에 가지가 부러졌던지, 생장점이 망가져서 더 이상 키울 수 없는 가지가 되었을 때, 삶과 죽음의 최후전선에서 죽음의 기운이 온몸에 뻗치지 않도록 사람의 백혈구처럼 맑고 진한 송진을 만들어 치열하게 저항하고 투쟁하였을 것이다.
송진은 끈적거림을 멈추고 나뭇가지 끝에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굳어지면서 보루를 만들어갔고 그것이 썩지 않는 붉은 속살을 가진 향기로운 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하산하자말자 우리 농장 초입에 서있던 크고 오래된 소나무에서 작년 봄에 잘라낸 죽은 가지를 가지러 갔다. 그냥 화목으로 쓸까하고 아무데나 방치한 것인데 그나마 제법 괜찮은 관솔이 골고루 형성된 것으로 기억이 났던 것이다.

길이가 2미터 정도인데 관솔이 가장 잘 익은 부분만 70센티미터 정도로 잘라냈다. 자른 단면의 나이테는 제법 근사한 동심원 그림을 나에게 선사했다. 사람이 흉내 내지 못할 위대하고 놀라운 예술이 자연에서는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다. 둥근 끌로 껍질을 벗기니 벌레 먹은 것이라 푸석거리며 떨어져 나갔다. 나무의 속을 드러내자 검붉고 흰 속살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죽음의 세력과 맞서 싸우면서 형성된 진한 생명의 향기가 터지자 피톤치트의 치유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둥근 끌 자국을 그대로 살려 손에 잡았을 때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내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 옆에 세워두면서 자주 손으로 움켜쥐어 본다. 직경 7센티미터 손에 잡히는 느낌이 그득하고 목 뒤로 가져가 힘을 약간 주어 누르면서 머리를 뒤로 젖히면 장시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고개를 숙인 피곤함이 사라진다.
가령산의 백 년 묵은 소나무 가지에는 품격이나 향기, 색깔, 영혼 등 모든 면에서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럽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 내 곁에 두며 사랑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생태포탈 새마갈노(http://www.eswn.kr)에도 이 기사가 수록되었습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