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악습

검토 완료

김영해(kiminorg12)등록 2012.02.07 14:16

조선 시대 초기에 과부 재가와 서자의 과거 응시를 왜 금지하였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다음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조선 왕조를 새로이 연 이성계, 이방원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어떻게 제도를 만들 것인가를 의논하였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국가를 이끌어갈 중심 이념을 주자학으로 정하였을 것이고 세부적인 내용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유학자 최치원은 당나라에서도 인정을 받은 당대의 석학이었지만 정작 고국인 신라에서는 육두품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실의 속에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바로 전 왕조 고려 때에는 한때 무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만약 몽고의 대규모 침입이 없었다면 그때까지도 무신 정권이 유지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역사에는 가정이 없으니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사대부들은 자신들만 신생국가 조선의 모든 주요한 관직을 독점하기로 하였을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 출신들이 군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군을 통솔하는 가장 높은 지위는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의 자리로 정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요. 임진왜란, 병자호란에서 이 제도의 불합리성이 드러난 것으로 짐작되지만 문관들 중에 아무도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예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드믄 일이므로 이산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의견을 누군가가 제시하였겠지요. 즉 과거에 의하여 선발되는 문관 출신들만 관직을 독점하게 되면 과거에 응시하여 통과되면 누구나 이론적으로는 관직에 등용되어야 합니다. 고려 시대까지는 과거에 의한 선발이 유일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모든 양반들이 과거에 응시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고려 시대까지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회였고 또한 승려가 되는 길도 열려 있었으므로 관직에 대한 경쟁이 그렇게 심한 사회 문제로 대두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주자학만이 허용되고 승려들이 하층계급이 되고 점차로 사회가 닫혀가게 될 것으로 예상한 사대부들이 대책을 강구하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 응시하는 길만이 양반 특히 문관의 미래를 보장하게 되자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제한할 필요가 대두한 것입니다. 제도적으로 양반을 제외한 중인, 평민 및 천민은 어차피 관리를 뽑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만들어져 왔을 것이므로 사대부들이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그래서 정실부인의 자식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양반들이 정실부인만 데리고 살면 되는데 왜 첩을 들여 서자를 만들었을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속성에 의하면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살기를 원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처녀만을 정실부인으로 선택하기를 원하므로 과부는 첩이 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이유로 과부가 정식으로 재가하여 정실부인이 되는 길을 원천 봉쇄한 것입니다. 비공식적으로 어느 양반의 첩 노릇을 하는 것은 묵인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즉 주자학에 입각한 정치를 표방하였지만 자신들의 권익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대부들이 만든 궁여지책이자 악법이 바로 과부 재가 금지와 서자 과거 응시 금지입니다.

 

이렇게 양반들이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살아가고 남녀 수가 대체로 동일하다면 평생 장가를 가지 못하는 평민이나 천민도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비교적 일찍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당한 문제가 되었을 것인데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는 모르지요. 그냥 한탄하면서 홀아비로 늙어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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