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누구

출구조사 결과 58.3% 1차 투표 승리 확신

검토 완료

권현종(davai827)등록 2012.03.05 11:39
보름간에 걸쳐 펼쳐졌던 선거 레이스는 이변 없이 막을 내렸다. 어제 3월4일은 제6대 러시아 대통령을 뽑는 선거 날이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관전 포인트는 "푸틴 vs 반푸틴" 의 양강 대결이었다.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부정선거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 최초로 전 투표장에 웹-카메라(cctv)를 설치했다.

투표는 62개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재외동포를 포함해 약 1억1천만 명의 유권자들이 2008년 헌법 개정 후 처음 도입되는 6년의 임기를 행사할 새 주인을 선출한다는 의미에서 국내외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투표소는 9만6천여 개가 있으며, 700여명의 국제선거감시단도 참여하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수천 명이 참여하는 지난 12.4 총선 부정선거 규탄시위, 깨끗한 선거 촉구와 이에 맞서 기득권을 과시하는 세몰이 지지대회로 후보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이 이루어 지지 못했다.

3.4 대권에 도전하는 후보는 다섯 명이었지만, 실제로 출사표를 던진 사람은 총 10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선관위로부터 후보자 등록이 거절되었다. 등록이 거절된 대표적인 인물로 90년대 초 "500일" 전환기시장경제개혁프로그램 저자이며 친미 자유시장주의자로 잘 알려진 야블라코(ЯБЛоко) 당 대표인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이다.

러시아 대통령 선거법에 따르면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하는 자는 유권자들로부터 '2백만 서명'을 받아 선관위에 제출해야 한다. 선관위는 야블린스키가 제출한 2백만 서명 가운데 상당량이 원본이 아닌 복사본들이었다고 밝혔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В. Жириновский), 게나지 주가노프(Г. Зюганов), 세르게이 미로노프(С. Миронов), 미하일 프로하로프(М. Прохоров), 블라디미르 푸틴(В. Путин)이다.

출구조사에서 1위를 차지해 당선이 확실시되는 블라디미르 푸틴 현 총리는 누구인가? 그는 대통령(제3,4대)을 두 번씩이나 역임했고, 이후 총리 자리로 옮겨 4년을 권좌에 머물렀다.

제6대부터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난다. 결론적으로 푸틴은 18년 간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를 통치할 권한을 국민들로부터 부여 받았다.

출생과 대학시절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은 1952년 10월7일생으로 레닌그라드(현 상트-뻬쩨르부르그) 시에서 세 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푸틴의 두 형은 그가 어린 시절 죽었다. 부모는 근면한 공장 노동자였다. 슬하에 2녀를 둠.

대학 입학 및 졸업 후

대학은 러시아의 명문 레닌그라드국립대학교(현 상트-뻬쩨르부르그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가 입학할 당시 지금은 고인이 된 아나톨리 소브차크 전 레닌그라드 시장이 본교에 재직 중이었다. 대학시절 푸틴은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75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푸틴은 구 국가안전위원회(KGB, 현 연방안보국)로 발령을 받는다(1975년). 이후 푸틴은 10년 동안 KGB 레닌그라드 분소에 근무한다. 

첩보원 시절...동독으로

푸틴은 국내에서 첩보요원 경력을 쌓은 뒤 1985년에 동독 주둔 소련 대외첩보국으로 파견된다. 푸틴은 "사회주의 진영" 가운데 동독으로 파견 근무를 간 것에 대해 아직도 정치적 경쟁자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푸틴은 소련-동독 드레즈덴스크 우정회관에서 5년간 KGB 분소에서 사장 직책을 가지고 근무했다. 귀국 후 중령으로 예편.

1990년 동독 공산당 정권으로부터 쫓겨난 푸틴은 조국 소련으로 귀국한다. 소련시절 대외첩보 요원 자리에서 물러나면 관행상 대외업무관련한 직무가 주어진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90년대 초 불안하고 어수선한 시기에 푸틴은 모교인 레닌그라드대학교 부총장 자리를 얻어 국제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전 소브차크 시장과 인연...정치인으로 출발

몇 달 후 푸틴은 당시 아나톨리 소브차크(А.Собчак) 레닌그라드 시(소비에트)의회 의장의 보좌관이 된다. 1991년 소브차크는 레닌그라드 시장 선거에 출마해 시장에 당선되었고, e아시 시장캠프본부장을 맡았던 푸틴은 시정부 시장대외연락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블라미디르 푸틴은 1991년 8월19~21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게까체뻬)가 일으킨 '8월 소요' 때에 KGB 조직에서 물러나면서 16년간에 첩보원 시절을 마감한다.

시정부 근무, 대외업무 장악...스캔들

상트-뻬쩨르부르그 시대외연락위원회 위원장으로 근무 중 푸틴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잦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 시절 구 KGB 요원들이 통념상 본인의 직권을 이용해 많은 부정들을 저질러왔던 겉처럼 푸틴도 위원장 직원을 남용해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1992년 상트-뻬쩨르부르그 시의회는 당시 마리나 살료(М.Салье) 시의장 지도하에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푸틴이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비철금속, 원재료 등과 관련해 대외 반출 허가 활동 시 배임업무에 배당하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정치로 이끈 소브차크...끝까지 의리 지켜

시의회특별조사위원회는 조사결과에서 푸틴은 재임 중 권력을 남용했다고 주장 하며 소브차크 시장에게 그를 경질시킬 것을 건의 한다. 그러나 1994년 소브차크 시장은 경질은 커녕 푸틴을 제1부시장에 임명하였고 위원장직도 병행하도록 했다.

선후배간 우정 학습

위기에 처했던 푸틴에게 끝까지 신뢰를 보여 줌으로써 소브차크는 푸틴의 확실한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맡는다. 소브차크는 푸틴의 대학교 대선배(14년 차)이다.

푸틴은 대선배에게 배운 '후배사랑' 법을 대통령인 D.메드베제프 후배에게 고스란히 전수하고 있다.

푸틴은 제4대 대통령 임기를 몇 달 앞두고 후배인 메드베제프 당시 제1부총리에게 권력을 승계했고, 메드베제프는 보답으로 푸틴에게 지난 9월24일 전당대회에서 푸틴 총리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임무교대가 신사적으로 이루어졌다.

통합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투톱이 제청과 수락이 반복되는 동안 수천 명의 지지자들과 당원들은 두 사람의 인간미, 우정 및 선후배간에 존경과 신뢰 등에 수차례 기립박수를 보냈다.  
푸틴 대통령 집권 후, 동향과 동문 = 출세 백지수표

2000년 푸틴이 대통령이 된 후 한동안 상트-뻬쩨르부르그 출신 고위공직자들의 모스크바로 향한 출세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실례로 현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제프, 이고리 세친 전 국방장관, 빅토르 주브코프, 게르만 그래프 전 대통령 경제수석, 드미트리 까자크 전 북카프카스지구대통령전권대표, 세르게이 나리시킨 현 하원의장, 블라디미르 추로프 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등.

선거 기술자로는 낙제점

1995년5월 푸틴은 당시 권력당(여당 격)이었던 "우리집-러시아 Наш дом — Россия"당 상트-뻬쩨르부르그 시지구당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1996년 푸틴은 알렉세이 쿠드린(전 재무장관)과 함께 소브차크 시장 선거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패배였고, 그 뒤로 푸틴은 모스크바로 옮겨 임시로 쿠드린집에서 기숙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치판에서 실패의 쓴 맛, 사업에서 만회

소브차크 시장 선거 패배 후 고향에서 푸틴은 동료들 몇 명과 공동으로 "오제라 Озеро 호수"라고 하는 다차(별장)소비자협동조합을 설립해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사업은 친인척들과 동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통령 행정실에서 행정경험

모스크바로 온 푸틴은 대통령 행정업무(크렘린궁 집사업무) 파벨 바로딘 실장의 부실장(법률행정업무담당)으로 크렘린궁에 둥지를 틀면서 큰 꿈을 꾸기 시작한다. 

푸틴은 1997년 대통령 행정실로 이직하여 당시 크렘린궁 행정감독업무를 총괄했던 쿠드린과 자리를 바꾼다.

이후 그는 공공 출세 행진을 한다. 1998년5월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지자체담당). 두 달 후 친정이었던 연방안보국(구 KGB 현 에프에스베 ФСБ) 국장에 임명된다.

정보망 장악&...

푸틴은 에프에스베 부국장에 옛 KGB 동료였던 니콜라이 파트루세프(현 국장), 빅토르 체르케소프, 세르게이 이바노프(전 국방장관) 등을 나란히 임명함으로써 정보국을 장악한다.

알코올중독과 만성적인 심장병으로 국정운영이 사실상 어려웠던 시기에 안보를 튼튼히 받쳐준 그는 옐친에게는 분명 구세주였을 것이다. 푸틴의 권력의 정점은 1999년 옐친 대통령이 대통령 직속기구인 안보회의 서기에 푸틴을 임명하면서 그 절정에 이른다. 푸틴은 에프에스베 국장직도 겸직 한다.

1999년8월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푸틴을 총리에 임명한다. 당시 옐친 대통령의 지지도는 2%에 불과했다.

총리 임명, 체첸전쟁은 푸틴에겐 기회...

푸틴이 총리에 임명되던 날 체첸반군의 영웅인 샤밀 바사예프가 지도하는 반군들이 이웃 다기스탄 공화국을 침범한다. 신임 총리는 조속히 체첸반군 작전 및 대테러대책에 돌입한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래서, 실례지만 우리는 화장실에서 너희들을 잡아, 결국 변소 똥통에 집어 쳐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푸틴이 체첸반군에게 전달한 강력한 메시지 이후부터 체첸반군들은 국제사회에서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러시아군의 전투기를 동원한 무차별한 공격에 당황한 바샤예프 반군들은 체첸 땅으로 퇴각해 잠복한다.
푸틴은 최근 생방송으로 진행된 국민과의 대화에서 당시 상황을 대테러 전쟁이라고 명명하며, 북카프카스에서 시민전쟁이 일어났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푸틴 인기 급상승, 대권과 성공

푸틴의 강력한 대체첸정책에 그의 지지율은 급상승한다. 1999년 12월31일 새해가 밝아 오기 전에 옐친 대통령은 대통령에서 물러날 것을 밝혔고, 푸틴은 러시아대통령 직무대행을 수행하게 된다.

푸틴은 2000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52%를 획득하면서 제3대 러시아 대통령이 된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첫 조치로 상원에 상주하는 상임의원(상원)제를 도입해, 그간 주지사들이 당연직으로 차지해 왔던 상원의원 구성 방식을 추천제 상원의원으로 바꿔 놓았다.

주지사 선거 대통령 추천, 호도르코프스키 구금 등

2004년 북-아세티야 베슬란에서 자행된 체첸반군에 의한 인질사건 이후 직선으로 뽑았던 주지사를 대통령의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꿔 놓았다.

푸틴은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에 대한 압력, 언론 및 공중파 TV 등 일방적인 선거운동을 펼쳤다는 이유로 인권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당시 국내외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전 유코스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과 플라톤 레비제프에 대한 구금 사건은 지금도 그에게 아킬레스건으로 남아 있다.   

경제 정책, 2004 대선

2000년대 초 푸틴은 많은 개혁 정책을 폈다. 그 가운데 소득세 13%까지 감면, 에너지 분야, 토지개혁, 안전화 폰드 설치 등.

2004년 제4대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의 주요 경쟁자들은 그의 높은 지지율 때문에 대선 레이스에 불참을 선언한다. 푸틴은 1차 투표에서 71%를 얻어 압승을 기록한다.

푸틴은 두 번째 대통령 임기 내내 3선에 대한 고심을 해왔다. 그러나 그는 헌법을 개정해 3선을 하자는 측근들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을 선택해 드미트리 메드베제프 당시 제1부총리에게 권력을 승계한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총리로 물러나면서 투톱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의 총리 재임시 푸틴은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리는 작업을 한다.

3선 도전 발판 마련

2011년 9월24일 통합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메드베제프 대통령은 푸틴을 제6대 러시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푸틴은 내가 만일 대통령이 된다면 메드베제프를 총리로 지목할 것이다 고 선언하며 역투톱 시대를 예고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제6대 러시아 대통령 당선

푸틴은 2011년 12월2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6대 러시아 대통령 후보 등록증을 수여했다.

3월4일 투표 유권자 출구조사에서 58.3%를 얻어 3선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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