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역사 처음으로 실시된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1153km를 달려가서 행사한 투표입니다. 재외국민 투표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19세 이상의 재외 영주권자와 선거 기간 중 국외 체류 예정자 또는 일시 체류자에게 부여하는 투표권입니다.
저는 현재 국제 NGO 단체인 생명누리의 일원으로 인도 남부의 힌두푸르(Hindupur)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생명누리는 행복한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주요한 목표로 마을개발센터를 운영하며 가축대부운동, 방과후교실, 도서관 운동, Self Help Group 지원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www.smnuri.com)
저와 생명누리 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이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하기까지는 몇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첫째, 투표에 대한 절박감의 부족입니다. 주로 2, 30대의 청년들이 해외봉사 활동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희생하며 낯선 인도 땅에 발을 내딛지만, 이들의 정치의식은 대한민국 표준 청년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왜 꼭 투표에 참여해야 하지?' '나는 우리 지역에서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투표에 참여한다고 한국 정치가 바뀔까?' '다 그 놈이 그 놈이지'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곧 몇 사람의 적극적인 설득과 추진으로 극복 되었습니다. 투표 행위가 가져올 결과에만 집착하기보다, 투표 과정을 통해 되새김질 되는 겨레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식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원했건, 원치 않았건 투표를 통해 선출된 정치인이라면 그의 행적이 공익을 위하고, 공정성을 잃지 않는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대통령 선거에 대한 결과를 온 국민은 담담히 견뎌내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다짐과 노력을 오늘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어려움은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힌두푸르에서 한국 영사관이 있는 뭄바이까지는 1153km, 22시간 정도의 기차여행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뭄바이는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한 입국도시입니다. 일주일 동안 여유 있게 휴가를 내어 투표도 하고, 뭄바이 구경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과 돈은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목요일 밤기차를 타고 금요일 밤에 도착해서, 토요일 오전에 투표를 끝내고 일요일 정오에 돌아오는 기차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침대 칸이긴 하지만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출발 당일 아픈 자원봉사자가 뭄바이행을 포기하는 것을 보니 저 또한 안 가는 방법이 무엇일까 꼼수를 부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반은 의무감에, 반은 떠밀려서 여권과 가방을 챙기고 뭄바이로 향하는 야간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 뭄바이로 향하는 기차 안 침대칸이 있는 기차다. 이곳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다. ⓒ 김준표
투표를 하면서 놀라게 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번 선거에서 그렇게 많은 정당들이 국민들의 표를 갈구하는지 몰랐습니다. 어림잡아 20개에 가까운 정당의 이름들이 긴 종이 위에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투표와 함께 생기는 기대감과 희망입니다. 마치 로또를 사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당선권에 있다면 짜릿한 승리감을, 군소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면 그 의미에 대한 자부심에 행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셋째, 그 먼 거리를 달려 소중한 투표를 행사하러 간 국민을 대하는 영사관 직원들, 참관인들의 태도입니다. 어떤 분은 재외국민 투표를 하며 환호성과 함께 박수 갈채를 받았다는데, 저희는 너무도 무덤덤한 인사만 나누었습니다. 소중한 한 표의 가치가 국내, 국외라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어려운 조건에서 부푼 가슴으로 달려온 이들에게 조금은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넷째, 짧은 시간이었지만 젊은이들이 투표를 하러 영사관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겨레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이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 투표를 마친 후 인증 사진 찰칵! 투표를 마치고 영사관 복도에서 인증 사진을 찍었다. ⓒ 김준표
어제 뉴스를 보니 재외국민 투표에 전체 대상 중 2.5% 의 저조한 투표율로 5만 6천여명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혈세 낭비라며 비판하겠지만, 5만 6천여명의 뜨거운 겨레사랑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4대강에 쏟아 부은 돈을 혈세 낭비라고 부르지, 국민의 투표 참여를 위해 쓰인 세금은 미래를 향한 투자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제도 개선을 통해 비용을 충분히 절감하며 더 많은 재외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제 저희는 인도의 일상으로 돌아와 기나긴 기차여행에서 생긴 피로를 회복하고, 인도의 순수한 아이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마을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저희의 관심과 안테나는 끊임없이 4월11일의 투표일로 향합니다. 우리와 같은 수고는 아니어도, 작은 불편과 게으름을 떨치고 일어선 많은 젊은이들이 투표장을 향해 성큼 달려가기를 희망합니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선거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입니다. 민주주의의 뿌리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권리라면 민주주의의 줄기는 참여와 실천입니다. 뿌리와 줄기가 없이 꽃을 피울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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