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와 남자는 출입 금지...여긴 '천국'입니다

[가족의 재발견①] 촌년 울보, 혼자라도 괜찮아... 야만 견뎌낼 '가족'을 만나다

등록 2012.05.04 18:28수정 2012.05.0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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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 셋. 돈도, 스펙도, 물려받을 재산도, 변변한 일자리도, 하물며 남자친구도 없는 내게 가장 든든한 사회안정망은 무엇일까?


한 달에 10만 원으로 임대 중인 3평 남짓한 방 안에서 밤이면 밤마다 곱씹어 보는 질문이다. '5년이라는 임대 기간 안에 다른 집으로 가기 위한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다시 고시원에서 도둑고양이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서글픔에 온 밤을 뒤척인다. 안 그래도 길게 내려앉은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갈 것 같다.

나이 서른 셋에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기본급도 주지 않는 텔레마케터? 눈 뜨면 하나씩 생겨나는 기업형 슈퍼마켓의 판매원? 사실상 전업이었던 학원 강사 일도 내 나이쯤 되면 입시 위주의 큰 학원으로 가거나 학원을 개업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한다.

하지만 이름 없는 영세 학원에서 비주류 과목만 전전해 온 내게는 '판타지 무협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해봤다던 '그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자리가 위협을 당하고, 주거도 불안정하니 도대체 내가 결혼은 고사하고 40대가 되면 무엇으로부터 나를 보호받을 수 있을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촌년 울보'였던 나... 루저가 되다

촌년 울보였던 내게 엄마는 "네가 잘 되도록 엄마가 돈이라도 좀 모아서 보태줘야 할텐데,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영화 <가족의 탄생> 중 한 장면 ⓒ 블루스톰


흔히들 '가족복지'라는 표현을 많이 쓰곤 한다. 심화되는 양극화에 비해 복지 수준은 너무나도 저열한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자녀들의 높은 등록금도, 25%에 육박하는 청년실업의 구직비용도, 고비용의 육아 부담도, 부모들의 노후 대책까지 무엇 하나 가족이 없다면 버틸 수 없는 구조다.


구로, 가산에서 직장을 다니는 청년층을 대상으로 진행한 청년유니온의 실태조사(2010년 11월)에 따르면, 40% 이상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직장을 구해도 가족의 품을 떠나 독립을 할 수 없다. 결혼해야 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대학 다닐 때부터 고향인 대구를 등지고 상경해 14년째 독립생활을 유지 중이다. 말이 좋아서 '독립'이다. 14년의 시간 동안 혼자 산 기간은 고시원 생활 1년여뿐이다. 13년 동안 적게는 두 명이서, 많게는 4명까지 항상 복작복작거리며 살아왔다.

대학교 1학년 때, 선배들과 처음 술을 먹다가 눈물 펑펑 흘리며 '집에 가고 싶다'고, '엄마 보고 싶다'고 눈물콧물 짜내는 통에 학부에서 '촌년 울보'라고 불렸던 나.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고향 방문은 명절에만 가는 연례행사가 됐다. 집에 용돈조차 드릴 수 없을 때는 '회사 일이 바쁘다'며 2년 동안 내려가지 않은 적도 있다.

"내 노후를 너에게 책임져 달라고 안 할 테니 네 앞가림만 잘 해라."

이렇게 말씀하시던 엄마가 "네가 잘되도록 엄마가 돈이라도 좀 모아서 보태줘야 할 텐데,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하다"는 말로 바뀌는 걸 실감한 순간, 난 '루저(패배자)' '불효자' '버러지' 등 온갖 나약한 단어들이 뇌리를 스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컴컴한 동굴 속... '가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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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동 고시원방 필자가 살던 고시원방의 모습. 이곳은 동굴이었다. ⓒ 김영경


그럼에도 나이가 들어가고, 그만큼 몸과 마음이 아픈 횟수가 잦아지고, 그리하여 많이 외롭고 서글퍼지는 나날을 보내다 보면, 가족을 향한 마음이 절실해진다. 그렇다고 꼭 피를 나눈 '혈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의 공간에서 서로의 아픔을 나눌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이다.

1년여의 고시원 생활을 거치면서 '가족의 부재'가 한 인간을 어떻게 처절한 절망으로 이끄는지 깨달았다. 오로지 종이와 매직으로 '상명하달'하는 고시원 총무와는 그 어떤 인간적 교감도 나눌 수 없었다.

어쩌다가 쉬는 날에 온종일 누워 있어도 '밥 먹으라'며 부르는 사람이 없고,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주말 내내 잠만 자다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는 동굴 같은 삶. 그 속에서 여실히 깨달은 것은 내게도 인간적인 교감을 나눌 사람이, 그러니까 '가족'이, 생활의 공간에서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메모지에 적은 한 줄... 마음을 열었네

1년간의 동굴, 아니 고시원 삶을 청산하고, 지금 내가 사는 집은 3개의 방을 한 칸씩 빌리고, 주방·욕실·거실을 함께 공유하는 공동 주거 형태의 임대주택이다. 하나의 주거공간을 3명의 가구주가 함께 쓰는 셈이다. 

내가 사는 곳은 한 여성단체에서 운영하는 임대주택.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에 약 20명 가량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이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여성만 사는 임대주택이다 보니 남성은 아예 출입이 불가능하다. 간혹 이삿짐을 나르러 들르는 것 외에는 아예 얼씬거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 임대주택의 설립 목적은 '여성의 자립'. 때문에 입주자들은 2개월 이상 '백수'로 지내면 안 된다는 규정도 있다.

이곳에는 지인의 도움으로 우연히 들어오게 됐다. 최저임금에 준하는 월급을 벌고, 고시원 생활을 1년여 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나름의 혜택(?)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찾아간 고시원에서 인간적 교감을 절실히 느끼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을 나눠 쓰는 불편함을 다시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이 생활이 좋지만은 않았다. 공동 공간은 방치돼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고, 한집에 사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굳게 닫은 문을 잘 열지 않았다.

이사를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의 욕실화가 너무 지저분해서 분홍색 새 슬리퍼를 사다 놨다. 그런데 그 욕실화에 자꾸 선명한 발자국이 생기는 것이었다. 씻어 놓으면 생기고, 씻어 놓으면 생기고.... 사소한 일이라지만, 주거 공간에서 사사건건 부딪히는 상황이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각자 출퇴근 시간도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조차 나누기 어려운 상황이라 처음에는 화장실 문에 메모지를 붙여 대화를 시도했다. 예전처럼 아는 후배나 동생과 함께 살았다면 단번에 해결될 문제였겠지만.... 낯선 이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는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와 문짝에 붙여놓은 메모지의 간극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다행히 메모지로 시도한 대화가 실내화 문제를 해결했고, 서로의 마음에는 약간의 '해빙 모드'가 형성됐다. 어떻게 문을 두드리고 각자의 방에서 나오면 되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고 할까.

같은 공간을 쓰는 낯선 가구주들과의 인간관계를 만들어 준 장치는 다름 아닌 '반상회'였다. 한 달에 한 번, 다른 층에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반상회를 개최한다. 반상회에 참여하는 인원 수는 10명이 조금 넘는다. 낯선 이들이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공동으로 해결할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많은 대화가 오가는데, 이를 통해 같은 공간에서 인간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반상회를 우리집 차원에서도 진행을 하고 있다. 생활비를 어떻게 걷고, 집에 필요한 생필품이 뭔지, 공동구역 청소는 어떻게 구역을 나누고 누가 맡을지 깨알 같이 나누고 토론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가끔이라도 밥을 함께 먹는 식구(食口), 그러니까 '가족'이 됐다. 이웃의 얼굴조차 모르는 이 삭막한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색다른 푸근함이다.

"라면 좀 그만 먹어요" 한 마디에 가슴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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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기몸살 걸렸을 때 같이 사는 동생이 차려준 밥상. 몸 아플 때 잘 먹어야 한다며 미역국에 잡곡밥을 차려 줬다. 동생이 요리를 잘해서 이 동생의 음식에는 이름을 붙여서 '화선정식'이라고 부른다. ⓒ 김영경


독립해 살면서 제일 서러운 것은 아플 때다. 나는 계절마다 꼭 한 번씩 아픈 체질이라 지난겨울에도 몸살 감기로 이틀을 앓아 누웠다. 큰 방의 동생이 보다 못했는지 출근하면서 쌍화차 한 병과 메모지에 편지를 써 놓고 갔다. 비몽사몽 간에 그 쌍화차를 들이키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동생이 들어와서 내 방문을 열더니 배를 잡고 웃으며 "언니, 혹시 내가 쌍화차라고 준 거 마셨어요?"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이거 쌍화차가 아니라 홍삼 드링크였어요. 언니 아프다니까 급한 마음에 저도 그게 그렇게 보였나 봐요"라며 막 웃는 게 아닌가. 나도 철석 같이 쌍화차라고 생각하며 들이켰는데, 그냥 드링크 음료였던 것이다. 약은 아니었지만 그 동생의 예쁜 마음 덕분에 그날 저녁에 바로 술을 마실 만큼 몸이 회복됐다. 이 이야기는 우리집의 전설이 됐다.

오늘도 큰 방의 동생은 "언니, 술 좀 그만 마셔요"란다. 옆 방 동생은 "언니, 밥 해 놓을 테니, 라면 좀 그만 먹어요. 언니 몸 생각해서 잡곡으로 쌀 샀으니까 몸 좀 챙겨요"라고 말을 건넨다. 사소하지만 애정과 관심이 담긴 말 한 마디. 그 어떠한 안전망도 없이 '야만의 시대'를 견뎌내고 있는 우리들을 다시 살아내게 한다.
#청년유니온 #가족의 재발견 #김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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