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감님, 마음껏 사랑하셔유

농촌에서 외로운 노인들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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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규(songmoses)등록 2012.06.18 11:08
1.
어제 오전 밭에 가기 전 청천면 농협에서
고추에 줄 영양제를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청수정 식당 모퉁이를 막 도는데 맞은편에서
탈탈거리며 오는 경운기를 보았다.
김 영감님이 몰고 밭에 가는가보다.
오늘은 왠지 좀 늦게 밭에 나간다 싶다.
아는 체하지 않고 차를 세우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얼핏 보니 앗! 경운기 뒤에 이 여사가 앉아 있다.

이런 광경-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촌로 부부가 밭에 일하러 가는 게 뭐 그리 이상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적잖이 놀라며 별의별 상상을 한다.
사실 김 영감님과 이 여사는 부부가 아니다.

작년 손바닥만한 우리 마을에서
두 분 사이에 그렇고 그런 좀 애매한 소문이 한창 떠돌다가
요즘은 없었던 일처럼 가라앉았다.
"김 영감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이 여사만을 모시고
저 모퉁이 돌아 호젓한 밭에서 마치 부부처럼 일한다...
마을 사람들이 뭐라 안할까?
이젠 그런 지껄임에는 개의치 않겠다는 배짱인가?"

2.
김 영감님은 일흔여덟의 홀아비고 이 여사는 예순여덟의 과부다.
이 여사는 과부가 된지 20년이 넘었다.
김 영감님은 재작년에 할머니와 사별했다.

그 할머니는 왈패였다. 동네 할머니들을 휘어잡았다.
경우가 바르고 말발이 세었기 때문이다.
쟁반같이 둥글고 넓은 얼굴에 몸은 비둔했으나
말은 거침이 없었고 목소리는 동네에서 제일 컸다.

내가 2010년 3월에 이 동네에 들어오자
할머니는 고추장, 장아찌 등 엄청 가져왔다.
이 좋은 할머니가 몸이 아주 좋지 않았다.
관절염, 디스크, 당뇨, 고혈압...약으로 살았다.
밭일은 고사하고 집안의 소소한 일도 어려웠다.
마음과 생각은 뻔한데 몸이 안 따라주고 아프니
사는 게 괴로웠을 것이다.

3.
할머니는 고된 일을 하고 돌아오는 할아버지에게
식사를 차려 줄 수도 없었다.
인천, 청주 등 자식들이 대처로 나가서
다들 빠듯하게 살기에 그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농촌에서는 농약이 많다.
제초제, 살충제…
눈 질끈 감고 탁 털어 넣었나 보다.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재작년 11월말이었다.
나는 청주의 한 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에 가서
자식들의 상판을 한번 보고 싶었다.

출가한 딸이 문상객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고운 얼굴인지…
정말 자는 듯 평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좋은 데 가신 것 같아요."

나는 그 자식들의 불효를 꾸짖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들의 변명을 사실로 믿으려 한다.
가족이 더불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데도
사람들은 풍요하고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4.
어이없이 홀아비가 된 김 영감님은
매일 울면서 지냈고 슬픔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교회에 비치된 봉투가 아닌
집에서 준비해 온 하얀 편지봉투에
두 말도 아닌 단 한 마디
"슬픔!"이라고 크게 썼다. 느낌표도 딱 찍었다!

그러다가 작년 대보름날 마을회관에서
작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원래 술을 즐기지 않던 이 여사가 술이 잔뜩 취해
횡설수설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김 영감에게 업어달라고 했다.
김 영감 역시 술이 취해 이 여사를 업고
마을회관 방안을 빙빙 돌면서 서로 입을 맞추었다.
모두가 경악하며 민망한 일이었다.
김 영감이 부인과 사별한지
불과 석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5.
며칠 후, 옆집 송 영감이 후다닥
내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보고 숨겨달라고 한다.
조금 있으니 술 취한 김 영감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송 영감을 때려죽인다고 나더러 내 놓으라고 한다.

두 양반은 동갑인데 이 마을에서 나고
이 마을에서 77년을 같이 살아온 천둥벌거숭이 친구다.
경위를 알고 보니 매일 술에 쩔어지내는 송 영감이
김 영감을 보자
"너 또 술 먹었어?" 하고 빈정거리자
불같은 분노가 치솟은 것이다.

이런 일에 친구라면
이 여사를 사모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이 여사와 동갑이며 가장 친한 네 마누라는 통해
다리를 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그런데 도와주기는커녕 빈정거리다니…
"이 씨팔 놈아, 술은 니가 매일 처먹고 지랄하면서
나더러 술을 마셨냐고 지껄이는 게 뭐야."

6.
두 분은 서로 좋아하는 건 분명하다.
결국 자녀들이 이해해주고 도와줘야 할 문제로 남았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두 분이 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김 영감님과 이 여사가 산모퉁이 돌아
호젓한 밭에서 일하면서
정이 오가는 시간을 보낼 게 아니겠는가!
그것도 괜찮겠다 싶다.
동네 사람들 수군거리는 것은 금방 지나간다.
두 분 부디 외로움을 달래며 오래오래 사랑하시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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