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 돼지들의 이야기

<돼지의 왕>을 들여다보다

검토 완료

김하경(hbrite92)등록 2012.07.14 13:48
친구에게 <돼지의 왕>을 추천받고 몇 번을 돌려보았습니다. 처음 보았던 날에는 한 장면의 잔상이 유독 뚜렷이 남아, 본 이후로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잠들 수 없었습니다. 조금 진정이 된 후 다시 천천히 영화를 되돌려보면서 친구의 말을 상기했었지요. "불편하다." 맞습니다. 상당히 불편한 영화였습니다. 비단 영화의 장르적 특성(스릴러)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가 던져주는 날카롭고 직선적인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시쳇말로 "불편한 진실"이라 부를 수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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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의 등장

한 회사의 대표인 경민은 자신의 사업이 모두 실패해버렸습니다. 그런 그는 중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인 종석을 수소문합니다. 종석은 출판사에서 어떤 유명 인사의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작가였으나, 그의 글을 탐탁찮아 하는 출판사 사장에게 수모를 받게 되지요. 그런 차에 경민의 연락으로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됩니다. 근황을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들은 중학교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학창 시절은 '철저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소위 권력자(혹은 관리자)라 불릴 수 있는 강민과 같은 아이들은 자신이 소속된 반을 맡아서 관리하고, 그 위에는 송석응이라는 윗 계급의 아이가, 그 위에는 더 높은 계급의 아이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권력자가 아닌 아이들은 성적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그들의 심기에 수틀리면 호되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지요. 경민과 종석, 두 사람의 계급은 높지 못했고 그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학생회장 후보가 경민과 종석의 반으로 연설을 하러오는데 경민이 그 날 숙제를 못 한 탓에 다들 경청하는 가운데 혼자 숙제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권력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경민을 지목하고 강민은 경민의 숙제를 찢어버립니다. 그 때, 철이가 등장한 것입니다. 종석의 말마따나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인물의 갑작스런 등장에 모두가 흠칫합니다. 철이는 가볍게 강민을 때려눕혔습니다. 경민은 그 사건을 이렇게 회상하지요. "그 때 난, 철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 일 이후로 철이와 경민, 그리고 종석은 조금씩 친해집니다. 폐가에 서로 모여 놀면서 철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야, 칼이 뭔지 아냐? 칼이란 건 말야, 이 짐승과 인간을 구별해주는 거야. 내 몸에 달린 것도 아니면서 나한테 힘을 주는 거지. 그러니까 이건, 절대 놓치면 안돼. 근데 사람들이 칼을 만들었을 때, 생각지도 못한 것이 만들어졌어. 그건 바로, '악'이다. 저 고양이의 날카로운 발톱처럼 몸의 일부인 이 칼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악'이란 말이야. 그런 우리가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착하게 살면 될까? 아니야. 힘을 가지려면, 우린 악해져야 돼. 계속 병신처럼 살고 싶지 않으면 괴물이 돼야 돼. 알겠냐?"

철이의 말은 폭력과 권력의 메커니즘을 기본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칼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곧, 권력. 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철이가 말한 '돼지들', 즉 우리들은 악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강민을 한번에 때려눕힌 전적이 있는 철이의 거침없는 행동 또한 철이는 '악'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힘을 갖게 되는 과정이니까요. 어쩌면 철이는 "폭력 말고는 저항의 수단이 없다는 사실"(배명훈, <동원 박사 세 사람-개를 포함한 경우>, 《타워》, 오멜라스, p.38)을 알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철이는 권력에 대응하기 위해 '악'으로 하여금 강해질 것을 말합니다.

찬영의 등장, 깨지는 새로운 힘

이 즈음, 새로운 인물이 전학을 옵니다. 바로 찬영 입니다. 찬영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태도를 지닌 아이였습니다. 친구들끼리 있을 때 자신을 너무 치켜세우지 않고 겸손하며, 강단도 있는 인물입니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어서 반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지요. 이런 모습이 권력자들에게는 영 아니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권력자 강민과 늘 붙어 다니던 한 아이가 찬영에게 시비를 걸지만, 찬영은 "내가 무슨 분위기를 망치는지 잘 모르겠는데. 나중에 내가 어떻게 분위기를 망치고 있나 정리를 해서 얘기를 해주면, 고쳐보도록 할게. 그 전에는 함부로 내 어깨에 손 얹지 마라."고 응수합니다. 마치, 학교폭력이 일어났을 때는 단호하게 "싫다"고 표현하라는 안내문의 지침처럼 말이지요.

경민은 이런 찬영의 모습을 동경합니다. 철이가 했던 말, 즉 '악해져야 한다'는 말은 틀린 것 같다고 말하면서 찬영과 친해지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민의 동경은 불과 며칠 만에 깨져버리고 말지요. 권력자 아이들이 찬영이의 심기를 작정하고 건드린 후에 그를 밟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찬영은 보통의 아이들이 당하는 것처럼 호되게 당한 후, 일상을 찾게 됩니다. '무언가를 바꿀 수도 있는 사람'의 대열에 찬영은 낄 수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니까 찬영의 교과서적인 방식, 당연히 이런 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방식은 통하지 않음을 경민과 종석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철이에게로 돌아갑니다.

비굴해야만 살아남는 돼지들

철이는 자신이 벌인 첫 사건 이후 정학 기간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가라오케를 하고 있던 아버지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던 경민을 구해준 것입니다. 강민 일행은 철이를 자신들보다 더 높은 계급에 속한 송석응에게로 유도하지만, 철이는 송석응마저도 때려눕힙니다. 종석은 "철이는 그렇게 '돼지들의 왕'이 되었다."고 말하지요. 한 계급, 그 다음 계급의 권력자를 차례차례 무너뜨리는 철이의 모습은 늘 그들에게 당하고만 살던 돼지들에게 있어 일말의 희망인 셈입니다. 여기에서 철이의 대사가 압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대사가 상당히 와 닿았습니다. 개인적인 제 경험 때문에요.

"무서운 거? 나 무서운 거 있다. 그게 뭔지 아냐? 너네가 10년이나 20년이 지나 어른이 됐을 때 지금을 생각하면서 '야, 그 때 참 좋았었지 않냐? 그 때가 그립다.' 이딴 소리를 할 게 너무 무서워. 석응아, 잘 들어. 아마 너한테 그런 미래는 없을 거다. 네가 나중에 이 때를 생각하기도 싫을 만한 중학교 시절로 만들어 줄게."

<돼지의 왕>에서처럼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저 또한 경민과 종석의 처지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권력자로 불리던 아이들은 어떤 명분도 구실도 없이 학교에 남겨 횡포를 부리기 일쑤였고, 저는 그 횡포가 누적 될수록 무너져가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기소침한 나날들, 그들의 시선에 웬만하면 걸려들지 않도록 주눅 들어 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철이의 말처럼, 나는 그들에게 당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어쩌면 크고 나서 기억하게 될 순간도 비참하고 힘들 것이 뻔한데 그들에게는 그저 '어린 날의 치기'로 비롯된 장난으로 그칠 것이라 생각하니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으레 폭력(혹은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당한 사람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요. 제가 그랬고, 경민과 종석을 비롯한 모든 돼지들 또한 그랬던 것입니다. 철이의 이 대사는 제게 얼마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도 해주었지요.

하지만 이것은 단편적인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철이의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음독으로 자살을 해버렸고, 철이는 "씨발, 돈, 돈, 돈! 이제 돈 얘기 좀 그만 해!"라고 할 정도로 돈이 가진 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편 철이가 송석응을 때려눕힌 이후로 경민과 종석은 옥상에 불려나와 철이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 구타당하던 중이었습니다. 경민은 그 힘에 못 이겨 철이가 자신들의 대장이 맞고, 그가 모든 일을 시켰다고 거짓말을 해버립니다. 권력자들은 이 말을 "너넨 친구들끼리도 팔아치우고 그러냐"는 식으로 의리를 운운하지요. 물론 비겁한 짓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경민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자신과 자신의 단짝은 죽도록 얻어맞고 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기에 굴욕과 비겁을 무릅쓰고 그런 말을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의리를 운운하는 권력자 아이들이 아이러니하게 보이는 대목이지요. 결국 옥상으로 오게 된 철이는 마지막 카드인 칼을 꺼내들고, 끝내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잠깐 뛰어넘어 돼지들의 비굴함이 드러나는 대목을 더 찾아보자면, 종석에게 건넨 찬영의 대사도 해당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찬영은 "내가 뭐 바꿀 수 있겠나? (…)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수를 써도 그 애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맘 상하는데, 이건 뭐 당연한 거 아니겠나. (…) 이제 그 애들 그냥 안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나중에 어른 되면 그런 애들이랑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도 없잖아." 라고 말합니다. 찬영의 말에도 어느 정도 수긍은 갑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결국 폭력을 수단으로 권력을 잡은 아이들의 행태를 그대로 방치하고 도피하는 것에 그칩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 나만 만나지 않으면 편하지 않은가 식의 태도. 생각해보면, 자신이 지금 만나지 않는 순간에 그들을 다른 누군가가 만나 곤혹을 치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또, 종석의 누나가 벌인 도둑질 사건도 돼지들의 비굴함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나가 워크맨을 훔쳐 달아나는 것을 가까스로 붙잡은 종석은 누나의 한탄을 듣게 되지요. 심지어 첫 대사는 찬영의 말과 비슷하기까지 합니다. "괜찮아, 이제 그 쪽 길로 안 다니면 돼." 이어지는 누나의 말은 비참하고 가슴 아픕니다. "사람들이 하나하나 당연하게 즐기는 거 포기하는 게 다 쌓여서 병신 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나는 하고 싶은 거 다 참으면서 워크맨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남들 다 입는 옷도 못 입고, 나중엔 어떻게 할 건데? (…) 병신 새끼, 넌 평생 그렇게 살아라, 병신으로. 말 한 마디도 못하고. 난 워크맨 훔쳐서라도 배워야겠어. 씨발, 이거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뭐가 얼마나 좋은 건지 배워야겠다고!" 종석의 누나는 영화 초반에 '게스' 청바지를 사달라고 졸라댄 적이 있습니다. 종석도 이렇게 회상하지요. "그래서 반지하의 방 한 칸짜리 우리 집에 집안의 모든 물건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른 물건이 오게 되었다." 고 말입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자신의 형편에 맞게끔만 쓰면 그것이야 말로 명품이겠습니다만, 사실 그것은 말로만 쉬운 일이지요. 더 좋은 청바지, 더 좋은 카세트 테이프, 더 좋은 어떤 무엇 무엇들… 지금 당장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에 나만 모르면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무엇들은 꽤 많습니다. 지금의 스마트폰 같은 경우처럼 말입니다. 종석의 집에 들어왔던 게스 청바지로, 그 청바지와 워크맨이 가지는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샀던 게스 청바지가 여성용인줄 모르고 입고 갔던 종석이 놀림을 받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그들처럼 되고 싶었을까? 난 절대 그들처럼 될 수 없다.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게스와 워크맨이 가지는 브랜드 네임은 권력자와 비슷한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이 조성해둔 어떤 분위기(영화에서는 '학교 분위기'라는 말로 상징됨), 그리고 게스와 워크맨 등 브랜드 네임이 가지는 사회적 분위기. 거기에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는, 소위 노예가 되어버린 돼지들의 현실. 자신의 분수껏 살면 그것이 좋은 인생이겠지만,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강력한 힘. 자신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그 힘.

영화에서는 그 힘을 가진 이들을 '개'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사랑받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개. 그들이 한때 분노의 표출 대상으로 삼았던 고양이의 환영이 이리도 비굴한 돼지들의 삶을 냉소하면서 말합니다. "드디어 분수에 맞게 행동하네. 그래, 잘 생각했다! 병신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살아야지. 잘 생각했어!"

돼지의 왕이 탄생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철이는 슬퍼하는 경민과 종석에게 '공개 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송석응에게 선전포고한 것과 같이요.

"돼지는 말이야. 살면서 자기 살을 찌우는게 유일한 행복이라 생각하는 거야. 그들이 주는 먹이를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먹을까. 온 종일 그 생각만 한단 말야. (…) 하지만 말이야, 그 살들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야. 그들의 먹이로서 그 살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른단 말이야. 돼지가 될 순 없어. 난 말이야, 진짜 악당이 되어가고 있어. 근데, 생각해보니까 악당이 되는 걸론 부족해. '괴물'이 돼야 해. 괴물. 진짜 괴물 말이야. (…) 아름다운 추억? 아니, 절대 그렇게 만들진 않겠어. 나, 공개 자살을 할 거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영원히 저주하면서, 자살할 거야. 그럼 아마 그들도 이 일을 웃으면서 얘기할 순 없을걸?"

철이의 계획에 경민과 종석은 동조하면서도 불안한 내색을 하곤 합니다. 경민과 종석은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에 와서 공개 자살이 일어나던 그 날을 회상하지요. 월요일 국민 조회 시간에 예정되어 있던 공개 자살. 그러나 사건의 내막은 달랐습니다.

경민은 그 날 어떤 기대감 내지 설렘에 사로잡혀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학교 주변을 걸으려 하고 있었는데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은 외진 곳에 혼자 웅크린 철이었습니다. 철이는 작전을 변경하자고 말합니다. 자살하는 척 할 테니 자기를 발견하고 소리나 좀 질러주라고. 그러면 누군가가 말리러 올라올 것이라고. 작전을 변경하기로 한 것은, 공개 자살 전에 철이의 심경을 변화시킬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이네 아버지가 하는 가라오케에서 아가씨로 일하던 철이 어머니는 자신의 힘겨운 삶을 가게 뒤 후미진 곳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로 토로하고, 철이가 그것을 몰래 들었던 것입니다. 냉혈한 같았던 철이도 가족 앞에서는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나약한 인간이었지요. 실망감에 휩싸인 경민이 국민 조회를 하기 위해 줄을 섰을 때, 옥상으로 불쑥 올라온 철이의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떨어지는 그를 보았습니다. 경민은 철이를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철이를 뒤에서 민 것이 종석이었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그 때 진짜 괴물을 보았다"는 말은 철이가 아닌 종석을 향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날, 종석은 철이와 경민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 또한 경민만큼, 혹은 경민보다 훨씬 더 실망과 비참함, 그를 넘어 돼지의 삶에서 늘 느끼고 있던 절망을 더 짙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좀 잘 살아봐야겠다는 철이의 몸을 가볍게 밀쳐냈습니다. "너는 왕이 되어야 해! 너는 왕이 돼야 한다고! 진짜 괴물이라고! 철이는 왕이 됐어, 너네들을 저주하는 왕이 되었다고!" 종석의 외침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경민의 대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냐?"

그렇습니다. 찬영의 말처럼, 그렇게도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학교는, 사회는,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대로 굴러갔습니다. 개와 돼지의 관계는 자신을 포함한 관계에서도, 자신의 주변에서도, 자신이 볼 수 없는 어느 먼 곳에서도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강민과 자신들, 강민과 송석응, 그들과 학생회장 후보와 같은 개-돼지의 관계가 있었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한 경민의 아버지와 철이 어머니의 개-돼지 관계, 경민의 아버지와 경민이 반의 담임의 관계도 있었습니다. 이 관계가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어른이 된 현재, 경민과 경민을 망하게 했던 강한 힘, 출판사 사장과 대필 작가인 종석, 그리고 종석과 종석에게 구타당하는 여자친구 명미. 시간이 흘러도 공간이 변해도 개와 돼지의 관계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철이가 못한 거, 내가 할게! 종석아, 넌 반드시 행복해져라." 마지막 말을 남기고 경민은 투신합니다. 철이 또한 결국 그 강력한 힘 앞에서 자발적으로 해내지 못했던 돼지들의 마지막 희망, 그 상징적 행위를 경민이 해보입니다. 한 때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 믿어왔던 철이도, 그 철이를 실제로 밀어버린 종석도, 어른이 된 후 철이가 자발적으로 하지 못했던 상징적 행위를 실제로 한 경민도 어떤 의미에서 모두 돼지의 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돼지의 왕이라고 해봐야 돼지는 돼지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달라졌냐는 경민의 말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날카롭게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아마 똑같이 파고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엇이 달라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폭력이, 그 폭력을 싸안고 있는 권력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지른 자들끼리도, 심지어 당한 자들끼리도 학습이 되어 어느 순간엔가 당한 자가 저지른 자가 되고 저지른 자가 당한 자가 될 수도 있는 현실. 예컨대 어린 시절 그렇게 폭력의 희생양 노릇을 해왔던 종석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개 패듯 패는 장면은 이 원리를 잘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경민의 주검 앞에서 명미의 전화를 받는 종석은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 사과는 물론 명미를 향해있는 것이지만 명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자신이 휘두른 힘에 눌려있던 명미를 비롯하여 철이, 경민, 자신, 그리고 모든 돼지들에게 바치는 하나의 무거운 인사에 가깝습니다.

영화 자체로만 놓고 봤을 때, 애니메이션 기법은 너무 어색해서 서투르게까지 보였습니다. 성우의 더빙도 인물 묘사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요. 이런 허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관객을 몰입하게 하고 끝난 이후에도 '불편하다'고 되 뇌일 수 있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상당히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왕'이라는 단어가 주는 우월감 내지 승리의 기운은 영화 후반으로 오면서 전복되어버리고, 끝끝내 패배감이 짙어지지만 시사 하는 바 워낙에 큰 덕에 반복해서 보는 동안에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인물의 면면을 새롭게 따져보는 일도 신선했고, 그 인물이 내적 논리를 따져가며 보는 것도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좋은 시선이라 생각합니다.
결말은 처참하게 나버렸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화를 똑똑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반영하는 이 세상을 더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돼지들이 개들을 위해 살을 찌우는 세상의 순환 고리를 일깨워준 <돼지의 왕>. 영화 마지막에 울리는 종석의 대사로 끝을 맺겠습니다.

"이 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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