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과학의 대화?

신과 우연

검토 완료

유성오(kierkeka)등록 2012.08.24 14:02
먼저 과학에 대한 얘기를 잠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과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의 관찰과 경험의 영역이다. 그 경험의 세계에는 질서와 법칙이 있다.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이 다루는 경험은 눈에 보이는 것, 다시 말해서 감각적 경험에 한정된다. 그 감각이라는 것도 인간의 감각에만 한정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감각기관(일종의 색안경)으로 본 경험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한결같이 똑같은 감각기관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 과학적 지식은 인간에게만 참일 수밖에 없다. 다른 감각기관을 가진 존재에게는 참이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개의 과학과 인간의 과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개와 인간의 감각기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것(감각을 넘어선 것/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과학이 침묵할 수밖에 없다. 감각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 과학은 제자리를 잃고 정체성을 상실한다.
과학이 다루는 경험의 세계는 반복적이어야 한다. 과학은 경험 세계의 법칙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법칙이 있다는 것은 그 경험이 일정한 인과율에 따라 되풀이 경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 한 번의 경험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법칙이라고 말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복 가능한 경험을 통해 어떤 원리와 법칙을 찾아내고 정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과학적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과학이 다루는 경험은 계량화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즉 수치로 환산하여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사랑의 경험 같은 것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 감정의 크기나 실재를 수치나 방정식으로 표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심장 박동 수, 눈동자의 크기, 몸 속 특정 호르몬의 양 등을 통해 수치화(과학화)해 보려는 시도도 있지만, 그렇게 제시된 수치들이 사랑이나 우울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본질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과학이 다루는 경험에는 동질성의 원리가 적용된다. 여기서 동질성의 원리란, 갑돌이가 경험한 것은 개똥이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대상이 되는 경험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가능한 경험에만 한정된다. 어릴 적에 TV에서 자전거(쇠)를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는 '기인열전' 같은 류의 프로에서 였던 것 같다. 쇠를 먹는다는 것은 그 프로에 등장한 특정한 사람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다. 다른 인간들에게서는 가능한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경험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은 그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없다. 그 사건이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었다. 분명한 사실이었다. 즉 '어떤 사건이 과학적이지 않음 = 그 사건은 사실이 아님.' 이라는 등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무신론자도 유신론자도 다 과학을 믿는다. 과학은 경험적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질서와 법칙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는 그 질서와 법칙을 우연이 창조했다는 것이고 유신론자는 신이 창조했다는 것이다. 우연의 창조라는 말이 거슬리는가?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다,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면 좀더 편한가. 아니면 우연히 생겼다, 신이 만들었다 고 하면 훨씬 더 편한가. 다 같은 얘기다. '그냥 생겼다'는 과학이고 '누군가 창조했다'는 비과학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언어적 편견 때문에 생겨나는 착각이다. 생긴 거나 창조나 같은 얘기고, 문제는 주체가 누구냐에 있다. 우연은 비이성적(무작위) 주체를 의미하고, 신은 이성적(질서/의도) 주체를 의미할 뿐이다. 우연은 주체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신도 마찬가지다. 다만 우주의 생성에 관계된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우연, 신이라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우연이 만들었음을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 그런 거는 애시당초 있을 수가 없다. 신이 만들었음을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도 역시 마찬가지로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우연과 신을 입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 질서와 법칙이 만들어진 이후에 과학-인간의 경험-이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렸다가 다시 질서와 법칙의 생성 과정을 인간이 경험할 수는 없다. 무(無)가 되는 순간 인간도 없다. 질서와 법칙의 생성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철학/형이상학)의 문제이다. 우연(무작위)이 만들었다고 믿을거냐 신(의도)이 만들었다고 믿을 거냐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이다. 왜? 경험적 반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연에 의한 창조(진화/무작위)나 신에 의한 창조(설계/의도)나 인간이 다시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과학이 입증할 내용이 아니다. 과학은 경험적 반복이 가능해야 한다. 과학은, 우연에 의한 것이든 신의 의한 것이든, 질서와 법칙의 창조된 이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연이 만들었다는 선택은 무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무작위적인 선택이라는 것이 어떤 질서를 띠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원숭이가 마구잡이로 한 시간 동안 타자기를 두드려서 '애국가' 라는 단어를 종이에 남긴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대개는 글쎄 하면서 고개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한 시간이 아니라, 한 십년 동안 원숭이가 타자를 친다면 어떨까. 왠지 십년 동안 두드리다 보면 어쩌다가 '애국가' 라는 단어를 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은 경우의 수를 무한히 늘림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 하려 한다. 그래서 우연에 의한 진화는 오랜 시간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신이 만들었다는 선택은 전지전능을 필요로 한다. 의도(계획)된 설계에 의해 무엇을 만들려면 고도의 지능이 필요하다. 요즈음 가장 첨단 장비라 여겨지는 우주선을 만드는 데도 엄청난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하물며 최첨단 장비인 우주선에도 없는 자기 복제 기능까지 갖춘 초소형 정밀 장비인 세포와 더 나아가 온갖 첨단 장비(눈, 콩팥, 관절, 척추신경, 뇌 등등)들로 장착된 인간이란 유기체와 시작도 끝도 모를 크기와 범위의 우주라는 질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한 능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신의 창조는 전지전능을 필요로 한다.
만일 인간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실험에 성공한다면 어찌 될까. 그것은 신의 패배일까, 우연의 패배일까. 아마도 우연의 패배일 듯싶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음을,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실험해서 성공함으로써 입증했기 때문이다. 실험에서는 마음 즉, 의도가 작동한다. 뭔가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 생명의 탄생이 가능해지는 조건과 방법을 찾으려는 의도가 실험 전 과정을 지배한다. 이는 과거의 생명 탄생에서도 의도의 지배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끔 경험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집을 짓겠다는 의도를 품고 벽돌을 던지는 자와 아무 생각 없이 벽돌을 던지는 자는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만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어느 쪽이 더 집지을 확률이 높으냐를 따져봤자 의미가 없다. 어차피 둘 다 집을 못 지을 테니까. 그렇다고 두 입장이 같은 것은 아니다.

덧붙이는 글 | 뉴스앤조이


덧붙이는 글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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