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지키지 못한 저는 평생 죄인입니다”

의료진의 의료과실과 과잉치료로 가장 잃은 경옥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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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호식(muisca95)등록 2012.09.07 18:42
창백한 얼굴에 당장이라도 입원시켜 영양주사라도 한 대 놓아주어야 할 것만 같은 슬픔어린 모습. 9월 5일 종로 엠스퀘어에서 열린 환자단체연합회의 '제2회 환자Shouting카페'에서 만난 사례자 경옥희 씨의 첫 인상이었다.

남편이 곁을 떠난 지 어느새 1년하고도 6개월이 넘었건만 남편과 함께 투병한 긴 시간은 마치 어제일인 것처럼 그녀의 마음과 모습에 고스란히 남았고 아주 작고 담담한 목소리로 그간의 이야기를 토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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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진의 의료과실과 과잉치료로 남편을 잃은 경옥희 씨가 샤우팅하고있다 ⓒ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떠나버리면 그만, 환자에 대한 의사의 책임감은 어디로?

건실한 직장인이자 가장이었던 남용진 씨는 2006년 11월 5일 직장건강검진에서 조기 위암진단을 받고 12월 6일 수술을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리고 추가검사에서 간에도 조기암이 발견되어 개복수술을 통해 위암과 간암을 모두 제거하기로 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마칠 수 있는 너무나도 단순한 한 가정의 투병수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수술을 집도하려했던 담당의사가 미국 연수를 가면서 다른 의사로 교체되었고 그 의사는 KBS에서 방영 중인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는 김태원이 받았던 ESD(내시경 점막하 박리술)을 권하며 그 것만으로도 위암 제거가 가능하며 간 역시 초기이기에 고주파 시술로 충분하다고 전했다.

개복수술보다 회복도 빠르고 환자에게 고통이 덜하다는 설득에 '좋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괜찮으니까 권하겠지' 하는 의료진에 대한 믿음으로 수술에 동의한 부부는 수술과 시술을 마치고 12월 21일 퇴원을 했다.

ESD는 내시경 끝의 칼로 위를 잘라내지 않고 점막에 국한된 위암을 제거하는 수술. 2cm 이상의 암에 이 수술이 허용된 것은 2011년 11월이다. ⓒ 국가암정보센터


하지만 4개월이 경과한 2007년 4월 위암은 임파선으로 전이가 되었고 6월 25일 입원 임파선 암은 수술을 통해 제거했지만 혈소판 수치가 낮다는 이유로 위암 제거를 위한 개복수술은 진행되지 않았고 계속 항암치료만 권유를 하던 의사 역시 6개월 만에 미국 연수를 간다고 떠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바뀐 의사 역시 3차 항암치료 후 미국 연수를 갔고 12차 항암을 마친 후 남편이 너무 힘들다며 수술을 요청하자 담당의사는 "남용진 씨는 암이 너무 일찍 발견된 것이 문제에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수술 날짜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남용진 씨는 2008년 12월 수술실에 들어갔지만 개복 후 손 하나 대지 못한 상태로 다시 수술실에서 나왔다. 당시 의사의 소견은 임파선 암이 3cm로 너무 커서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 지금도 경옥희 씨는 당시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파선에 있는 3cm의 암이 얼마나 큰 사이즈이기에 국내에서 최고라 하는 서울대병원의 전문의들이 손 하나 대지 못하고 그냥 나온 것일까?'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믿었던 의료진, 하지만 믿던 도끼에 찍힌 발등

너무도 이상한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경옥희 씨는 서울대병원 의료진에게 무한신뢰를 보이는 남편을 설득해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위암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교수를 찾아 외래진료를 신청했고 의사는 "왜 진작 개복수술을 하지 않았느냐?"며 반문 했다. 하지만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은 교수 역시 타 병원의 실수임을 인지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이후의 투병은 더욱 눈물겨웠다. 2009년 1월부터 9월까지 30회나 진행된 방사선치료에는 주변의 조직에 손상이 덜 하다는 소리에 보통 10만원 하는 방사선보다 4.5배나 비싼 45만 원짜리 방사선을 사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 저렴한 방사선으로 바꾸려했지만 중간엔 바꿀 수 없다는 소리만 되돌아 왔다.

방사선 치료 중간에는 식도정맥술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5회나 받았지만 나중에 판독된 CT를 보니 불필요한 수술이었고 처음 2.2cm의 작은 초기 암이었던 위암은 2009년 12월 진행성 위암 4기로 판정받기에 이르렀다.

상태를 살핀 의료진은 위와 복부 전체에 퍼진 암에 <팍크린탁세>라는 항암주사를 사용했고 부작용이 심한 이 주사는 건장하던 남편을 앙상한 뼈만 남게 만들었다. 2009년 12월 29일 항암주사 부작용으로 위궤양 출혈이 발생했지만 담당교수는 백혈구 수치가 0에 가까움에도 <팍크린탁세>를 3번이나 더 사용했고, 의료진과 간호사들은 곧 죽을 것같이 불안해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남편에게 이제 괜찮으니 집에 가서 쉬라며 퇴원을 종용했다.

결국 2010년 1월 19일 퇴원한 남용진 씨는 외래진료를 다니다가 2월 3일 새벽 3시 위암 치료를 위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에 의한 위궤양 출혈로 아산병원 응급실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억울해 억울해'하던 남편과의 마지막 저녁, 절대 잊을 수 없어요.

담담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내던 경옥희 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저녁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경옥희 씨는 담담한 모습으로 그간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설명했으며 듣는 이들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탄식을 담아냈다. ⓒ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남편이 무언가를 의식했는지 아이들에게 나훈아의 '궁'이라는 노래가 들어있는 CD를 사오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들어봐 우리가 너무 잘못 살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잖아. 너무 잘못 살았어. 너무 알뜰하게 살았는데 내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았는지 정말 억울하다 억울해라며 눈물을 흘렸죠."

사실 남용진 환자의 경우는 2.2cm의 초기암이 위 상부가 아닌 하부에 위치해 있어 개복 후 절제술과 수술 후 치료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위암은 조기에 발견하면 5년 생존율이 90%이상으로 완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SD도 비싼 방사선치료도 그저 환자에게 더 좋다니까 바보같이 그 말만 믿었어요. 내가 암에 대한 공부를 해서 이렇게 치료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병원으로 옮길 수 도 있었을 텐데.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제가 죄인 같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그저 담담하게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던 경옥희 씨의 눈가가 붉게 변하더니 어느새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한다.

"남편은 암 치료 중에도 직장생활을 할 만큼 건강했어요. 다른 환자들도 이렇게 건강한 분이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어요. 할 정도였죠. 남편이 복숭아를 정말 좋아했는데 이젠 길에서든 마트에서든 복숭아만 보면 눈물이 흐르네요. 복숭아뿐만 아니라 남편이 좋아하던 음식들 이제 먹지 못할 것 같아요"

늘 건실하고 건강했던 남편과 경옥희 씨의 행복한 모습. ⓒ 경옥희


경옥희 씨는 의료진에게 "이제 이별을 준비하셔야 할 듯합니다."라는 한마디만 들었어도 남편이 마지막 순간 아이들조차 보지 못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경옥희 씨는 서울대병원 의료진을 상대로 형사고소를 했고 수사는 진행 중에 있다. 아쉬운 것은 대한의사협회조차 "남용진 환자의 경우 복강경수술 또는 개복수술이 필요했다"는 감정결과를 알려 왔고 2006년 당시 ESD(내시경 점막하 박리술)은 안전성에 논란이 있었다. 무엇보다 암의 크기가 2cm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SED가 아닌 개복수술을 하는 것이 표준치료였다. 하지만 조사를 받으러 온 의료진들이 남용진 씨는 제가 주치의가 아니라고 발뺌하거나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3년간 만난 9명의 의사들 중 남용진 씨의 주치의는 과연 누구였으며 머리가 빠지고 살갗을 녹이는 부작용으로 잡은 수저가 시려 집어 던질 정도로 악화 되었던 남용진 씨의 죽음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것일까?

2006년 처음 내원한 그 순간부터 2010년 2월 3일 새벽 임종을 맞기까지 한 순간 한 순간이 너무도 생생하다는 경옥희 씨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오늘 샤우팅에 참여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의사를 무서워하지 말고 스스로 알아보고 용감하게 묻고 해결해가며 치료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기회를 지나친 것이 후회가 되고 억울하며 무엇보다 남편에게 미안하기만 하다는 경옥희 씨의 싸움은 이제 출발점에 놓였고 앞으로 긴 시간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바라기는 부디 정의라는 녀석이 이 사회에서 살아 숨 쉬어 이와 같은 평범한 가정의 행복을 한순간에 빼앗긴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올바른 길을 찾아가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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