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어째서 '유죄'입니까
개인의 양심이 허락되지 않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한국.
국익이 인권보다 우선하는 나라
대법원 형사 1부(주심 김창석 대법관)은 지난 9월 13일 예비군 훈련에 불참한 하모씨(30)에게 '국방의 의무는 궁극적으로 국민 전체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하씨의 양심의 자유가 이같은 헌법적 법익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하며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 사건 상고심(2012도6026)에서 벌금 15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또한 대법원은 "하씨가 훈련소집 통지서를 받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는 때마다 각각 죄가 성립하므로, 훈련소집통지에 불응해 유죄의 판결이 확정됐다 하더라도 다른 훈련소집통지에 불응한 행위를 처벌할 수 있고, 이중처벌금지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볼 수 없다" 고 밝혀 훈련소집 불응 1회마다 1회의 범죄가 성립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는 박정희 정권 시절 1974년부터 다양한 형태로 자행된 병역거부자의 중복 처벌과 무엇이 다른가. 집총거부를 이미 선언한 자에게 다음날 재차 집총을 명하고 이를 거부한 병역거부자에게는 경합법이라 하여 1.5배의 형량을 선고하거나,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에게 군교도소 내에서 재차 군사 훈련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다시 형량을 추가했던 그 시절의 사례들과 유사한 일이다.
후퇴하는 인권의 역사
위의 대법원 판결을 본다면 2012년 현재 한국 병역거부 인권의 역사는 대체복무제 도입을 눈앞에 두던 2007년에서부터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970년대 로 돌아가는 형국이니 40년을 거꾸로 퇴보하는 듯하다. 종교적 신념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옥살이를 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오랜 역사를 외면하고 이를 '범죄'로 만들어버리는 현 대법원의 판결은 너무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결정이다. 한국 병역거부의 역사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왜 한국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국가가 되었는가.
1939년 6월 일제가 조선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 38명을 체포한 최초의 병역거부를 시작으로 한국 병역거부의 역사는 올해로 74년이나 되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병역거부가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떠올라 민감한 인권 이슈가 된 지는 십년을 넘었다. 2001년 12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처음, 오태양씨가 병역 거부를 선언하면서부터 병역거부는 이슈화되었고, 이후 2002년 1월 서울남부지법은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하여 위헌 심판을 제청하였다. 이에 2004년 8월 헌법재판소는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하여 합헌 결정은 하였으나 대체 복무 필요성을 인정하고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2명을 포함한 7명의 재판관이 대체 복무제 입법을 권고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2005년 3월 17대 국회는 병역법 개정안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하였지만 한나라당의 반대로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였다. 국회에서 관철되지 못한 대체복무제 도입은 2007년 국방부에서 다시 추진 계획을 발표하면서 살아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2009년 국방부는 여론 조사를 근거로 기존 방침을 번복하여 대체 복무 도입 반대를 결정하게 된다. 대체 복무제 입법이 헌법 재판소, 국회, 행정부를 오가는 동안 국제 사회와 시민사회는 수차례 한국 정부에게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인권 상황을 개선할 것을 촉구하였다. 2003년 유엔고등판무관실과 대만병무청이 참석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열렸으며, 국제엠네스티는 2002년 당시 대통령후보들에게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대체 복무제 도입을 권고했고,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06년, 2010년, 2011년까지 "한국 정부가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조약' 18조 1항을 위반했다"며 보상과 구제 조처를 권고했다. 2008년에는 국제사면위원회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인권 상황 개선을 촉구하였다.
▲ 병역법88조에 대한 헌법재판소 합헌 결정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
2011년 8월 30일, 한 병역거부자가 헌재 결정에 대한 입장 발표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 처벌,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국가 폭력
하지만 작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우리나라 특유의 안보 상황'을 들며 병역법 제88조 제1항 제1호와 향토예비군설치법 제15조 제8항에 대해 7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대체복무제 입법은 한걸음 더 후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올해 6월 18일 정부는 유엔 인권이사회가 권고한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부 입장을 밝혔다. 유엔 총장을 배출한 나라에서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고를 공식적으로 무시하는 이 같은 결정은 한국 정부와 헌법재판소의 인권 보호 의지 부재와 부족한 인권 의식을 국제 사회에 드러낸 꼴이 되었다.
병역거부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한국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작년 7월 7일, 유럽재판소는 병역거부자를 가둔 아르메니아 정부에게 유럽인권협약을 위반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병역거부권이 유럽인권협약 9조에 규정된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에 의해 보호됨을 인정한 것이다. 또, 올해 1월 17일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반복해서 기소하고 처벌하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처벌'을 금지하는 유럽인권협약 제3조 위반으로 보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한 아르메니아 및 터키에게 배상을 명령한 바 있다. 국가가 국민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이를 처벌한 것은 국민에 대한 국가 폭력으로 보아 이를 보상할 것을 명한 결정인 것이다.
안보가 우선? 통일 전에 이미 대체복무제 실시한 나라는
현재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80여개국, 그 중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네덜란드, 이스라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을 포함한 40여개국이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헌법이나 법률에 명시하고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거나 현재 그러한 나라들도 이에 포함된다. 서독은 통일 전에 이미 모든 유형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인정하고 비전투대원이나 문관으로 근무하도록 규정하였으며, 1964년부터 동독도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비전투대원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국과 대치상황에 있는 대만 역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 전수안 대법관 퇴임사 전시 사진
2012년 7월 10일 전수안 대법관의 퇴임사 중 일부. <병역거부자료전 '74년'>에 전시되어 있는 부분이다. ⓒ 병역거부자료전74년
양심과 종교적 신념은 무죄
한국 사회와 정부가 대체복무제 입법을 미루는 십년동안 4185명의 병역거부자가 6473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였고, 현재에도 800여명의 병역 거부자가 감옥에 갇혀 있다. 이 숫자는 전세계 병역거부자 수의 80%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국은 병역거부 수감자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병역거부자들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 부끄러운 1위의 자리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대체복무제 개선을 고대하며 기다리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해마다 적게는 500명, 많게는 900명의 한국 청년들이 병역거부를 이유로 징역을 살고 있다. 한국 병역거부의 역사는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무려 74년. 언제까지 한국 사회는 '사람으로 태어나 다른 사람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유죄'라고 선고하며 범죄자로 낙인찍을 것인가. 양심과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온가족이 그리고 그의 후손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징역을 살아야만 하는 이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역사를, 이제는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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