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물을 퍼내던 어느 겨울날

나는 세입자다-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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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운(yajowoo)등록 2012.10.18 11:29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는 집. 부모님 집이라지만 재산상의 소유자가 아닌 세를 얻어 사는 세입자였기에, 이사 할 날을 2년씩 꼽아보면서 살아야 하는 남의 집인 것입니다. 수없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가끔은 1층 단독 주택을 내 집처럼 산적도 있고, 때로는 널널한 옥상에 흙을 날라다 텃밭을 만들어, 밥상 위 채소 반찬거리를 손수 마련하는 재미에 좋아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전세살이지만 그럴땐 집 있고 없고가 별 문제가 아닌듯 했습니다.
아들인 제가 부모님의 집에서 독립하게 된 것은 10년 전 결혼하면서부터입니다. 저 또한 다른 동네에서 전세를 살고 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라서 그리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합니다.

부모님 집은 다가구 주택이고 제가 사는 집은 30년도 더 된 낡은 아파트입니다. 두 집이 형태는 달라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울 여러곳에서 볼 수 있는 재개발, 재건축 바람이 끊임없이 일렁이고, 사람 많이 다니는 담벽에는 찬성, 반대가 크게 적힌 현수막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네는 오랫동안 터잡고 사는 토박이들 수 못지않게 개발이익을 보려고 집을 미리 사놓은 낯 선 집주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개발 기대로 잔뜩 부푼 동네에 세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집이 없는 것에 더해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짊어지고 삽니다.

어느 집이든 살다보면 고쳐야 할 곳이 군데군데 발생하고 간혹 천재지변 등으로 크게 수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집주인들은 얼마 안있어 부수고 말 집에 괜한 돈 들이는 일로 생각해서 그런지 선뜻 나서서 처리해주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임시응변으로 땜질하고 마는 것으로 넘어가려 할 때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부모님 집의 집주인은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 얼굴 보기도 어렵고 전화 통화 한 번 하기도 쉽지 않은 경우입니다. 주방에 천장이 내려앉은 것, 겨울에 오래된 보일러가 수명을 다하여 방바닥을 얼음바닥으로 만든 것 등을 의논하고 협조를 부탁하면, 그로부터 서너 달 지나야 겨우 손봐줍니다. 같은 서울에 살지만 떨어져 사는 아들로서는 연로하신 부모님의 건강과 안전이 걱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몇 해 전,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은 어느날 새벽에 일입니다. 출근 30분 전으로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기 한참 전에 휴대폰 벨소리가 먼저 울렸습니다. 액정창에 표시된 '부모님집'을 보고서는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혹시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가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모 자식 간의 일인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이었습니다. "큰 일 났다"를 반복하시며 얼른 좀 와야 겠다며 재촉하십니다. 방 바닥에서 물이 올라와 물바다가 됬다며, 두 분이 자다가 크게 놀라 가구며 TV며 옷가지를 밖으로 내놨다는 소리가 불규칙한 한 숨에 섞여 들려왔습니다. 평소 성격이 조용하고 말이 느긋하신 어머니가 그날 새벽엔 빠르고 정확한 발음에 힘이 넘쳤습니다. 물론 더 안좋은 징후로 느껴졌죠.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고 도착해서 보니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보기가 딱한 풍경이었습니다. 안방의 반을 물이 차지하였고 물이 몰려있는 한 쪽 구석에서 아버지가 쓰레받이로 물을 담아 양동이에 옮기는 모습이 꼭 수해를 당한 수재민 신세였습니다.

출근은 포기했습니다. 회사에 사정 얘기하고 오후에 나간다는 확실치 않은 약속을 덤으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물 퍼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내 집이든 남의 집이든 살면서 밖에 날씨는 매우 맑고 건조한데, 집 안방 깊숙한 곳에서 물 퍼내기 작업을 하리라고 누가 한 번이라도 생각 할 수 있을까...기가 막혔습니다.
퍼내고 퍼내도 방바닥 밑에서 샘솟듯 계속 물이 올라왔습니다. 점심때가 지나서도 양동이에 철철 차고 넘치도록 물을 날랐지만 일이 마무리 되기에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집주인과 어렵게 통화해서 상황얘기, 비용얘기 해가면서 동네 설비공사에 의뢰했습니다. 방바닥을 뜯고 그 밑으로 가로질러 놓여진 물 파이프를 보강하고 나서 더 이상 물이 솟아나지 않았습니다. 공사하는 분들이 방바닥 밑으로 물 파이프가 지나가는 것을 두고 신기한듯 얘기함과 동시에 혀를 차는 걸 들었습니다. 밖이 어둑해질때가 되서야 방바닥은 원래의 장판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공사가 끝난 뒤 이 황망한 일의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집을 지은지 아주 오래되어 집 구조와 마감재 모두가 낡았다는 것과 처음 지을 당시 집 짓는 기술의 한계이거나, 또는 집장사들에 의해 날림으로 지은 엉성함이 지금에서야 터진 것이라고. 그런만큼 관리가 철저했어야 했는데, 언제부턴가 개발 소식을 타면서 오히려 대충 넘어가는 이유가 되었다는게 그 날 이 집을 거쳐간 주위 사람들의 모아진 의견이었습니다.
여러 세입자들이 들고나가면서 여러 불편사항이 있었고 대부분 부모님이 이사와서 겪은 일들과 동일했다는 '전래 이야기'가 하나 둘 보태졌습니다.

지방에 본가를 둔 주인의 입장에서는 재개발을 기다리는 와중에 세입자들의 불편, 불만들을 그때 그때 겉만 덮고가는 식으로 지나갔을 것입니다. 집을 소유한 이유가 땅과 집들이 가져올 이익을 바란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집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저 임대차계약서 상의 삶으로 치부될 수 있는건가 하는 물음이 목에 가시 걸리듯 걸렸습니다. 새벽부터 놀라고 어리둥절 하셨을 여든을 넘기신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와 어느때보다도 또렷한 음성으로 아들을 부르던 어머니 곁에서 툭 털어내듯 밷어낼 수 없었습니다. 우선 제대로 이바지 해드리지 못하는 죄송함이 짙눌렀습니다.

부모님 인생에 녹아 들어있는 수 많은 추억의 이삿날들을 반추할 때마다 입 밖으로 절로 나오던 '집없는 설움' 중 하나를 목격한 날이었습니다. 부모님 집을 나와 아내와 딸이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집으로 향했습니다. 명절이면 대기업 건설사 현수막이 나부끼는 재개발 예정지이기도 하고 부모님이 '아들네 집'이라고 하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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