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그거 휴대폰 맞아요? 진짜 신기하다."
"쌤! 그거 넘 신기한데, 사진 찍어도 돼요? 미니 홈피에 올리고 싶어서..."
수업 중에 아이들 시선이 '그거'에 꽂혔다. 요즘 스마트폰의 사분의 일 크기도 채 안 되는 내 '투지'(2G) 핸드폰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내가 2005년에 구입한 폰이니 족히 7년은 되었다. 얼마 전부터 숫자 '3'이 새겨진 버튼 하나가 잘 눌리지 않긴 해도, 그런대로 불편함 없이 잘 쓰고 있다.
워낙 기계와 친하지 않은데다, 그나마도 업그레이드에 무감각한 나로서는 '간절하지 않은 변화'에는 좀처럼 손을 내밀지 않는 편이다. 무엇보다 남들 하는 대로 무작정 따라 하는 게 싫고, 별 쓸모도 없는 물건에 돈을 쓰는 일이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카카오톡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대세라는데, 그런 의심스러운 존재를 통해 내 사생활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지인들이 아무리 초대한다고 편지를 보내와도, 끝까지 페이스북Facebook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대한민국은 '스마트폰 천국'
카카오톡 사용자 수가 (해외 사용자 수를 합하여) 4천만 명을 넘어섰고, 하루 오가는 메시지 수만 해도 10억 건을 초과했다는 뉴스를 접한 게 몇 달 전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니,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지하철을 타면 너도나도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애니팡 게임을 하거나, 채팅인지 뭔지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사람을 보고 얘기하지 않고 화면을 보고 말을 섞으며 재미있다고 낄낄대다니, 참 요지경 세상이다.
이 정도면 가히 '스마트폰 천국'이라고 할 만하다. 덕분에 삼성전자는 돈방석에 앉았다. 지난 3분기(7~9월)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52조원에 달했고, 영업이익은 8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애플과의 특허권 소송에도 불구하고, '갤럭시S3' 스마트폰은 3분기에만 2천만 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입이 딱 벌어진다.
하지만 결코 '스마트하지 않은' 사람들
문제는 이러한 스마트폰 열풍이 사람들을 별로 스마트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내 주관적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스마트폰 탓에 사람들은 점점 더 멍청해지고 비주체적인 소비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냥 느낌이 아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하루가 다르게 깨닫는 현실이다.
요즘 아이들은 무슨 일이건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법이 없다. 80년대 후반 학력고사 준비할 때 혼자서 교과서만 열심히 팠던 나로서는, 과외 선생님과 학원 강사, 인터넷 강의 족집게 강사 등 외부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아이들이 달갑지 않다. 조금만 문제가 안 풀려도 조르르 선생님한테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어릴 적부터 저렇게 꽃처럼 크면 안 되는데. 나중에 찬바람 불면 어찌 견디려고...'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정말 '스마트한 책' 두 권을 발견하다
이런 내 생각을 뒷받침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은 내 생각에 질서를 부여한, 책 두 권을 찾았다. 하나는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가 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원제: The Shallows)』이고, 다른 하나는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최근 펴낸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원제: 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이다.
이 두 권의 책은 서로 닮았다. 같은 사람이 쓴 책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주제의식을 보여 준다. 『The Shallows』는 신문에 난 서평을 읽은 후, 왠지 마음이 끌려 구입해 읽었다. 영어교사라는 자존심에 영어판에 도전했다.
인터넷이라는 '얕은 물'에서 허우적대는 현대인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저자가 진단하는 21세기는, 인터넷이라는 '얕은 물'에서 허우적대는 현대인들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시공간이다. 현대인들은 몇 번의 손쉬운 클릭만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을 무한정 소비한다. 사람들은 (책이나 사람들의 말이 아닌)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쌓는 한편, 마치 자신이 생산한 정보인 것처럼 무분별하게 사용해버린다.
문제는 이렇게 디지털 기기에 종속된 인간의 사고방식mindset이 바람직스럽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길고 어려운 글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한글 40자(80byte) 단문 메시지short messaging service에 길들여진 탓이다. 하물며 글쓰기는 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은어와 맞춤법이 틀린 글자를 조합해 엄지로 눌러 쓰는 '글'이라고 해봐야 기껏 100자가 안 된다. 정보는 끊임없이, 빠르게 오가지만 깊이가 없다. 온통 '휘발성 지식' 투성이다.
인터넷 정보가 왜 휘발적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 또는 종이책을 읽는 것과 컴퓨터 화면으로 정보를 접하는 것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번역은 필자).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보는 온라인 텍스트 한 페이지는 종이로 인쇄된 텍스트 한 페이지와 비슷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웹문서를 스크롤바를 이용해 내려 보거나 마우스로 클릭하는 것은, 책이나 잡지의 어떤 페이지를 붙들고 있거나 넘기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신체 활동과 감각 자극을 필요로 한다. 연구에 따르면, 책읽기라는 인지 행동은 단지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을 끌어들인다. 즉, 그것은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노르웨이 문학 교수인 Anne Mangen은, "모든 독서는 다중 감각을 필요로 한다"고 썼다. 글로 쓰인 작품의 "물질에 대한 감각-운동 경험"과 "텍스트 내용물에 대한 인지적 처리 과정" 사이에는 "중대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종이에서 스크린으로의 이동은 단순히 우리가 저작물을 읽는 방식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저작물에 가하는 집중도와 몰입의 깊이에도 영향을 미친다. (The Shallows, p. 90)
아침에 눈뜨자마자 접하는 온라인 정보가 사람들의 인식 수준을 떨어뜨리고, 천박하고 얕은 지식으로 무장하게 만들고 있다. 이메일부터 트위터, 페이스북,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온갖 전자 정보가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 부박한 일상 속에서 인간관계는 점점 피폐해지고, 너절한 클릭질과 무분별한 터치가 비루한 소통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화려하지만 천박한, '껍데기와의 소통'
인터넷과 액정화면은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화려하고 자극적이다. 게다가 엄청나게 빠르다. 아이들은 다 아는 소식을 수업에 들어간 교사만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속도에 깊이는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화려함의 이면에 천박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끝도 없이 문자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그래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앞에 있는 사람의 눈동자를 보고 말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쓰는 '기계 문자'는 전원이 꺼지는 순간,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가슴에 오래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간성이 제거된 껍데기와의 소통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이제, 좀 더 최근에 읽은 지그문트 바우만의『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옮겨가 보자.
'Crowded solitude'? 제목에 이끌리다
이 책 역시 신문지상의 서평에 이끌려 인터넷으로 책을―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양장본hardcover은 단념하고 문고판paperback을― 주문해 읽었다. 이 책을 사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책 목차에 등장한 'Crowded solitude'라는 소제목이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번역하기에는 왠지 2% 부족한, 뭔가 나를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이번에도 무모하게 영문판을 샀다.
책은 솔직히 좀 어려웠다. 바우만은 '강남 스타일'이 아닌, 만연체 스타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요즘 보기 드문, 예리하고 깊은 통찰이 있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책 내용 중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법한,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 교육 모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소통의 방식'과 관련된 부분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과연 '고독을 잃어버린 존재'인가?
바우만의 두 번째 편지―편지라기보다는 칼럼에 가깝고, 책은 모두 44개의 조각글을 모아 놓은 형식이다―'Crowded solitude(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번역은 필자).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웹사이트에 가면, 한 달에 3천통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십대 소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한 달에 3천 건이면 하루 평균 1백 건을 보냈다는 것이고, 이는 아침, 점심, 밤, 평일, 주말, 수업시간, 점심시간, 숙제하는 시간, 양치질하는 시간 등 깨어있는 시간 동안 10분에 한 번꼴로 메시지를 날렸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그 학생은 10분 이상 혼자 있어본 일이 거의 없다. 그녀만의 생각, 꿈, 걱정, 소망 등 온전히 자신만의 홀로 있는 시간을 결코 갖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껏,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않고 온전하게 혼자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뭘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왜 웃고 우는지 등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 학생은 그런 기술(홀로서기)에 대해 한 번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 그녀는 늘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소중한 기술을 익힐 능력을 얻지 못한 것이다. (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 p. 6)
'휴대폰 중독'이 우리나라만의 사회적 병리 현상인 줄 알았더니,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휴대폰, 인터넷 등 전자매체에 사슬처럼 묶여 있는 우리는, 이제 혼자서 고독을 누리거나 사색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친구를 만나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만난 것일까? 값비싼 기계와 사귀는 사람들은 과연 '자유로운 영혼'인가?
83세의 바우만은 이 책에서, 현대 사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한 에세이 형식으로 들려준다. 그런데 그 부드러움이 읽는 이의 폐부를 깊숙이 찌른다. 그는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소셜 네트워크(SNS)social network service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일단 온라인에 '상시로 접속해' 있다면, 어떤 면에서 당신은 충분하면서도 진실하게 혼자 있을 수 없게 된 셈이다." (같은 책, p. 9)
이 말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난 '혼자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내가 가르치는 우리 아이들은 정말, 얼마만큼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충분히, 그리고 진실로 혼자 있는 법을 알고 있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할까?
고독이 주는 건강한 힘을 회복하려면?
저자는 이렇게 참된 고독이 주는 건강한 힘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병적인 자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소통과 사회적 유대social ties를 회복할 것을 권한다. 물처럼 흘러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근대에서, 개인들이 겪는 불안과 고독은 혼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공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역설이다. '혼자 있는 힘'은 혼자서 기를 수 없다! 여럿이 힘을 합쳐 모순과 불합리에 저항해야만 가능하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같은 책, p. 182)
서평을 쓰고자 한 것도 아닌데, 책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한 것 같다. 이제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로 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아래 사진을 보자. 필자가 지난 여름방학 때 21박 22일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는데, 그 때 직접 찍은 것이다.
▲ 남체(Namche) 마을 풍경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네팔 히말라야 산악마을 Namche의 전경 ⓒ 신정섭
위 사진은 네팔 히말라야의 '남체Namche'라는 마을 풍경이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산장(lodge)과 상점들이다. 아래는 그 마을에 사는 아이들 사진인데, 등굣길에 개를 안고 포즈를 취한 장면이다.
▲ 남체 마을 아이들 남체에서 쿰중 힐러리 스쿨까지 꼬박 2시간 반을 걸어 등하교를 하는 네팔의 중학생들 ⓒ 신정섭
이 아이들은 중학생인데, 마을에 학교가 없기 때문에 매일 2시간 남짓 산을 '뛰어' 넘어 쿰중Kumjung이라는 곳의 힐러리스쿨Hillary High School로 등하교를 한다. 왕복 5시간의 산악행군이지만, 좀처럼 피곤하거나 짜증내는 기색이 없었다. 너무나 해맑게 웃던 아이들... 처음 만난 외국인 앞에서 자랑스럽게 과학책을 읽어 주었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 얼굴 위로 대한민국 아이들의 잔뜩 찌푸린 얼굴이 겹쳐지면서 난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잃었다. 가장 행복해야 할 시기 우리 아이들에게서 웃음을 앗아간 어른들... 내가 바로 그 한복판에 있었다. 웃음과 행복을 교실에 저당 잡힌 채, 기계 부속품처럼 하루하루 버겁게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결국 핵심은 '유의미하고 인간적인' 소통이다.
요즘 아이들이 고가의 스마트폰을 사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이라기보다 카톡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과 교류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이버 공간이 아니면 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의 부박한 일상이 인간적인 교류를 차단하고, 무의미한 '껍데기 정보'의 무한 소비를 조장하고 있다.
대안은 유의미하고 인간적인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다. 사이버 중독의 범람 속에서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는 인간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면, 홀로 골방에 처박혀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액정화면을 터치하는 천박한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따뜻한 체온을 가진 사람들끼리 시선을 공유하는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치유하는 일에 너도나도 활발하게 참여해야 한다.
"선생님, 그거 휴대폰 맞아요?"
라는 질문에,
"그럼, 이게 짱이야. 손 안에 쏙 들어가고, 화날 때 집어던져도 안 망가져."
라고 답한 건, 괜찮은 응답reaction이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눈빛을 교환하며, 정말 인간적인 웃음을 나누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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