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들의 산티아고 습격기

십대들에게 스페인 산티아고길은 약인가 독인가~! 샨티학교 아이들과 이길을 함께 걸으며 고민하다.

검토 완료

채수영(soopool21)등록 2012.10.26 18:07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산티아고로 가는 이유나 목표를 정하지 못했다. 모스크바를 거쳐서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13시간을 비행기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뭔가 그럴듯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도 아이들의 흔한 대답과 똑같이 '그냥', '학교에서 결정했으니까'라는 이유를 넘지 못했다. 다만 그럴싸하게 포장을 했다. "그냥 걸어요." "그냥 걷는 것이 가장 잘 걷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외국인을 만나면 "I just walking. Just walking is the best walking, I think."라고 말해주었다. 사실 이건 포장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나의 평소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니까.
난 '목적이 이끄는 삶'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목적을 결정하는 것보다 목적이 나를 구속하는 느낌이 싫기도 하고, 어떤 곳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구분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에 특별한 목적을 두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지도교사인 나의 이런 철학이 우리조가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의 일상에도 묻어났다. 우리의 생활규칙은 간단했다. 숙소(알베르게)에서 떠들지 않기,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일어나는 시간도 자유이고 중간에 쉬었다 가든 경치가 좋아서 놀다 가든 간섭하지 않았다.
우리조의 여행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2주간 프랑스의 생샹피드포르에서 로그로뇨까지 200km를 걸었던 시기. 두 번째는 로그로뇨에서 레온까지 300km 정도의 구간에서 열흘간 카미노(산티아고 가는 길)를 아예 벗어나서 자유여행을 한 시기. 그리고 마지막 3기는 레온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300km 정도를 걸었던 시기이다.

* 첫째날,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본 풍경 이국적인 풍광에 안개가 끼어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 샨티학교


1기는 새로운 풍경과의 만남이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밀밭길과 들판, 소떼, 양떼들 그리고 중세 때의 모습 그대로인 골목과 집들은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어면서 산위의 푸른 초원과 양떼들을 보고 알퐁스 도테의 '별'이 생각났고, 밤이 되면 그 양치기와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저기 어디쯤에서 꿈의 대화를 하고 있겠지. 오늘밤은 내가 그 양치기가 되는 상상을 하며 머릿속도 즐거웠다.

저기 어디쯤에 양치기와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있겠지~! 알퐁스 도테의 '별'은 배경이 알프스산맥 어디쯤이고, 여긴 피레네산맥이다. 근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 샨티학교


둘째 날부터 걸으면서 조원들끼리 매일 짝을 바꿔가며 일대일 데이트를 했다. 평소 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친하지 않은 친구와는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실제로 이 일대일 데이트에서 입학 후 처음으로 대화를 해본 경우도 있었다. 지현이와 재우는 여기서 처음으로 대화를 했고, 좋은 만남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카미노(산티아고 길)에서의 일상은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늦게 일어나고 싶어도 8시면 알베르게에서 무조건 나와야 했고, 힘들어도 목적지까지는 걸어야 했고, 숙소에 있는 컴퓨터는 느린데다가 한글 지원이 되지 않았고,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도 많았다. 빨래도 스스로 해야 했다. 무엇보다 일상이 무료한 단순반복이었다. 특히 장난기 많은 아이들로 구성된 우리조 아이들에게는 정말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었던 것 같다.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 끝없이 어이지는 산티아고길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 샨티학교


중세거리의 악동 우리 알베르게(숙소) 앞에서 프랑스 꼬마가 엄마 한테 때를 쓴다. 우리 샨티학교 아이들이 샘들한테 때 쓰는 것과 넘 닮았다. 결국 모두 애들이다. 작은 애, 큰 애... ⓒ 샨티학교


새로운 풍경도, 조원들과의 대화도, 매일 쓰는 일기도 지루해질 때 쯤, 우리는 경로를 벗어나보기로 했다. 자유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앞서서 걷고 있는 다른 조원들을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만 세우고 1차 자유여행을 했다. 다들 나름대로의 여행계획을 세운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지나온 도시중에서 제법 규모있고 시설이 많은 팜플로나에서 다 모였다. 난 개인적으로 바르셀로나로 가서 가우디의 '그라나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고 싶었지만 경비부족 때문에 팜플로나로 갔다. 그렇다고 여기에 죽치고 있을 내가 아니지. 알베르게 주인장이 영어를 좀 하는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산세바스티안'이라는 프랑스 국경과 가까운 대서양해변의 휴양지였다.
나를 따르는 하은이, 재우와 함께 길을 나섰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여기도 산티아고길이 있었다. 원래 우리가 걷던 길은 '프랑스 길(카미노 데 프랑스)'이었고, 여긴 덜 유명하지만 스페인 북쪽 해안선을 따라 다양한 경치를 지닌 '북쪽길(카미노 데 노르테)'이었다.
우리는 여기 해변에서 수영도 하고, 유럽 여성들의 가슴도 구경하고(대체로 마흔을 넘긴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비키니 상의를 벗고 다닌다. 그냥 신체의 일부일 뿐인 것이다.), 성당앞 광장에서 유럽 젊은이들이 모여서 어떻게 노는지도 구경했다. 맥주나 포도주 한잔으로 한시간 이상을 유쾌하게 즐기는 모습, 술을 급하게 마시는 법이 없고 대화를 위한 윤활유 정도로 이용했다. 약간 우스쾅스런 차림을 한 남자들이 앉아 있는 미녀들에 옆에 애인이 있든 없든 뽀뽀를 요구하는 모습, 거기에 흔쾌히 응하는 여성들, 응하지 않아도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들은 정말 우리의 부러움을 샀다. 이것이 유럽인들의 여유인가~! 하은이는 그제서야 스페인어를 배워오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아니 영어라도 좀 할 줄 알았다면 나도 저기에 섞여서 어울릴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유럽 아주머니들의 드러낸 가슴이 익숙해질 즈음에 우린 중간 집결지인 부르고스로 갔다. 결과는 팜플로나에 계속 남은 친구들은 편하게 휴식은 취했지만 무료했고, 산세바스티안으로 간 우리 일행은 색다른 경험에 대만족이었다.

산세바스티안해변의 자유 첫째 날은 날씨가 흐리고 추워서 약간 실망이었다. 둘째 날 대만족이었다. ㅎㅎ 뭐가 대만족이란 말이지. 수영을 할 수 있어서.... ⓒ 샨티학교


그래서 4일간의 2차 자유여행은 모두 함께 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 북쪽길의 해변도시 산탄데르, 여기서는 조원 모두가 해변에서 놀았고 남자들은 돈이 없기도 하고 경험삼아 공원에서 노숙을 했다. 돈이 부족해서 노숙한 친구들은 돈을 아껴쓰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경험삼아 한 친구들은 노숙은 두 번 다시 할 게 못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난 우리 아이들이 해변에서 노는 모습을 보면서, 참 한국인이 성미가 급하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전날밤에 노숙하면서 잠을 설친 바람에 난 해변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이불삼아 얼굴만 가리고 낮잠을 잤다. 조금 떨어진 곳이 갑자기 시끄럽다. 우리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모래싸움도 하고 친구들 물에 빠트리기도 하고 신나게 논다. 딱 30분이었다. 길게 잡아도 4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다 놀고 해변을 떠났다. 얘기하고, 책 읽고, 선탠하고, 수영하고를 반복하며 하루종일을 즐기는 유럽인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가끔은 그들의 여유가 맹숭맹숭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기에 호불호를 말하긴 어렵지만 다르긴 정말 달랐다. 우린 또 해변으로 출근하는 것이 익숙해질 즈음에 다시 프랑스길로 돌아갔다.

레온에서, 이제 종착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다시 걷기명상으로 들어갔다. 자유여행을 통해서 바람기를 빼어서 그런지 이제 걷는 것으로 징징거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일곱 명의 학생과 한명의 교사, 도합 여덟 명이 20여일을 붙어 다니다 보니 이제 슬슬 조원들끼리 티격태격 대기 시작했다. 발단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고른다고 항의하는 데서 시작했다. 항상 감정은 사소한 것에서 터진다. 그동안 서로 부대끼면서 한 말과 행동에서 쌓인 감정을 이렇게 표출하는 것이다. 난 3~4일 동안 지켜보며 서로 풀거나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전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개입했다. 학교에서 하던 '느낌나무', 각자가 쌓였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서로 요구할 것과 받아들일 것을 분명히 했다. 다시 조원들 사이에 생기가 돌았다.
여행의 묘미는 도중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일 게다. 바르셀로나에서 유학하고 있는 스물여섯의 젊은 친구, 상천이 오빠(우린 남녀구분 없이 모두 이렇게 불렀다)가 마지막 2주 정도를 우리와 동행을 했다. 아직 청소년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기도 하고 사교성도 좋아서 우리 아이들과 금방 친하게 지냈다. 거기다가 개개인의 기상시간이나 일정까지 꼼꼼히 살펴주어서 나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보조교사였다. 무엇보다 마음이 맞았다. 그는 별이 총총한 스페인의 밤길을 걸어보고 싶다고 했고, 나도 아이들도 대찬성이었다. 비록 이건 계획한 날부터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까지 흐리고 비가 오는 바람에 이뤄지진 않았지만 끝없이 이어진 밀밭길을 따라서 까미노의 밤을 만끽하는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산티아고에 입성하는 날 정말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맑은 날이라면 성당앞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제분위기였을 텐데, 아쉽게도 몇몇이 비를 피해가며 그동안의 여정을 자축했다. 자전거를 번쩍 들고 사진을 찍는 다른 페레그리노(순례자)들을 보면서 우리도 배낭을 번쩍 들고 사진을 찍으며 대장정을 끝을 마쳤다.

맨발의 순례자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종착지) 앞에서 프랑스에서 온 이 친구는 팜플로나에서 여기까지 700km정도를 맨발로 걸었다. '순례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친구이다. 길을 걸으며 두어번 얘기를 나눴는데, 아이들이 카미노 순례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자신의 결정으로 왔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맞는 말인데, 나도 알고 있는데 왜 삶은 말처럼 안 되는지.... ⓒ 샨티학교


대장정의 끝 종착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앞에서 자전거를 번쩍 들고 사진찍는 다른 순례자를 흉내내며, 배낭을 번쩍 들었다. (가운데 배낭 높이 들은 친구가 상천이 오빠) ⓒ 채수영


산티아고와 작별하고 귀국을 위해 마드리드로 가는 길에서 난 우울했다. 이제 여행을 마감해야 한다는 아쉬움이 순례를 끝낸 후련함 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이들의 생각은 후련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기기엔 마음의 문이 너무 닫혀있었고, 대화하며 깨닫는 기쁨을 맛보기엔 언어의 장벽이 너무 컸고, 인생을 반추하기엔 살아온 삶이 너무 짧았고, 인생을 설계하기엔 고민의 깊이가 너무 얕았다. 아이들에겐 거저 걷기만 하는 까미노 순례가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을 게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알아갔고, 함께 사는 법을 배웠고, 어쩔 수 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매일 짝을 바꿔가며 이뤄진 일대일 데이트는 나름 성공작이었다. 난 아직도 그때 나눈 많은 얘기들을 생각하며 실없이 웃는다. 인생을 즐길 줄 아는 하은이, 나름대로 들은 게 많은 서동, 놀만큼 놀아본 그래서 예리한 구석이 있는 경진이, 자기마음을 조리있게 얘기할 줄 아는 예인이, 항상 활기차고 화끈한 지현이, 인터넷과 컴퓨터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고민할 줄 아는 재우, 늘 듬직하지만 때론 투정도 부리고 싶은 고운이. 난 주변에서 샨티학교의 아이들을 보고 대안학교를 다니는 덕분에 청소년 시기를 즐겁고 편하게 보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한편으로는 동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친구들이 이제껏 집에서 일반학교에서 많은 상처를 받아왔고, 또 앞으로의 인생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편안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난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게서 그런 고민의 흔적을 보았으니까.
아디오스~! 까미노. 적어도 이제 샨티아이들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가 어디 있는 무엇인지는 다들 안다. 이건 분명한 진보다.

스페인에서, 나는 다만 반대한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를 소형 펼침막을 배낭에 달고 다니다가 적당한 조형물이 있으면 매달고 왔다. 카미노(산티아고길)가 평화의 길이면 뭔가 통하는게 있겠지...라며 애써 자위하며. 샨티학교는 작년 국내이동학습 때에 제주 강정에서 박원순 변호사(서울시장이 되기 전)의 간담회에 참여하면서 해군기지 해군기지의 불필요함을 공유한 바 있다. 다만 아이들 개개인이 얼마나 자기확신을 가지고 이 펼침막을 달고 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채수영


지붕위의 고양이 스페인 시골 농가 모습, 우리네 시골 모습과 흡사해서 또 지붕위의 고양이가 너무나 평화롭고 아늑한 기분을 연출해서 한 컷 찍어 보았다. 사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들어가면 옛날 우리 외할머니 같은 분이 나를 반겨주시지는 않을까~! ⓒ 샨티학교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